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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 | 인터뷰 [인터뷰]
멈추지 않는 바위 뚫기
‘한국적’ 오페라의 길을 가다
문동환(객원기자)(2015-07-02 17:00:22)

오페라의 불모지 전북에서 불씨를 이어오고 있는 이가 있다. 마땅한 불쏘시개도 장작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스스로의 열정을 태워가며 오페라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그 자신이 스스로 말한 것처럼 지역에서 오페라를 한다는 것은 돌 위에 나무를 심어 키우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무모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정은 무모함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척박하다 못해 황량하기 그지없는 토양에 오페라의 씨앗을 심고, 이제는 서른 해째를 맞으며 명실 공히 국내 대표적인 민간 오페라단으로 올라선 호남오페라단의 조장남 단장을 만나봤다.

 

"교수에게는 세 가지의 책무가 있어요. 하나는 자기 연구이고, 둘째는 학생들 지도하는 일, 세 번째가 사회봉사입니다"

 

조장남 단장이 호남오페라단을 창단한 것은 1986년 7월. 그 해 조장남 단장은 군산대 전임강사로 임용되었고 임용 직후에 호남오페라단 창단에 나섰다. 학자로서의 연구 활동과 선생으로서의 제자 지도는 물론, 지역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게 교수로서 그의 신념이었는데, 오페라단 창단과 운영은 그가 생각하는 교수로서의 세 번째 책무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물론, 오페라 특성 상 순전히 민간 역량만으로 오페라단을 운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난제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책무감과 함께 오페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기에 걸림돌보다는 가능성에 더 주목했다. 나머지 문제는 일일이 몸으로 부딪히며 해결해 나갔다. 가장 큰 문제였던 재원 마련은 몸부림 수준이었다. 삼엄한 군부독재 정권 시절이었던 창단 당시, 창단 공연비 마련을 위해 군사정권의 청와대 문을 노크하는 '무모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작비 충당을 위해 사비를 터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작정한 일이었다. "처음 창단할 때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나는 오페라 해야 하니까 봉급 받으면 반절 밖에 줄 수 없다'" 양해를 구한 것인지 일방적인 통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의 배려와 응원이 없었다면 호남오페라단은 올해 창단 30년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국내에 40개 정도의 민간 오페라단체가 활동하고 있지만 창작오페라를 하는 오페라단은 없어요. 저희는 지금까지 9개 창작작품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도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호남오페라단은 창단 이래 주로 창작 오페라에 주력해왔다. 특히, 지역의 토착적인 소재나 국악 장르를 오페라에 접목시키는 작업은 호남오페라단만이 보여주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강점이다. "외국의 유명 오페라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죠. 이런 오페라는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지만 좀 더 가치 있는 창작활동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전북은 국악의 고장인데 전 세계에 내놓을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한 거예요"가장 비근한 예로 창작오페라 '루갈다'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초 신유박해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는 '루갈다'는 숲정이와 전주옥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부부의 스토리를 다루는 작품이다. 스토리만 보면 종교색 짙은 작품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는 작품이다. '루갈다'는 특히, 소재와 표현방식 등 모든 측면에서 서구 문화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온 오페라에 전통국악의 창과 판소리, 한국무용 등을 접목시켜 이른 바, '한국적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루갈다'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4회 공연 전석 매진 기록과 함께, 2013년 국립오페라단 창작산실 지원사업 우수작품 제작지원 공모 최우수작 선정,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공연 등 지역의 민간 오페라단이 일구어낸 성과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기염을 토해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 소극장 부문 최우수상 수상을 수상한 '흥부와 놀부'(2010), 대한민국 오페라대상 창작부문 최우수상과 연출가상, 최우수 가수상을 수상한 '논개'(2010) 등, 호남오페라단은 화려한 수상경력을 보유한 창작오페라를 무대에 올려오고 있다. 오페라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이 일천한 악조건이라면 유명 레퍼토리를 카피해서 단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급급했을 법도 하지만, 조장남 단장은 오히려 역발상을 시도하여 지역 고유의 스토리나 지역의 국악 전통에 주목한 것이다. 게다가 시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법한 일을 예술적 완성도까지 추구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일구어냈다는 것은 앞으로도 지역 문화사에 큰 족적으로 남을만하다. 이쯤 되면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가히 '오페라 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얘기가 아닐 것 같다.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하는 관립 예술단이 아닌데도 30년 간 꾸준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오페라의 어원이 일이 많다는 뜻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이끌고 조율하는 게 쉽지 않죠. 돈도 많이 들고. 그래도 원칙이 있는데 하나는 출연금과 협연료는 반드시 계약한 액수대로 지급하고 부족하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충당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못한 건 딱 한 번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실력이 있어도 작품 성격에 어울리지 않거나 연습 과정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캐스팅에서 배제하죠."조장남 단장은 비록 어려운 여건이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는 인간적인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최고의 캐스팅만을 고집해 왔다. 그 결과 현재는 호남오페라단 작품에 대한 신뢰도가 쌓여 전국적으로 실력을 갖춘 가수들의 참여의지가 높고, 덕분에 더블캐스팅도 어렵지 않게 해결하고 있다. 창단 초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오페라 불모지에서 일구어낸 호남오페라단의 성과도 그간 조장남 단장이 고집스럽게 작품의 완성도를 천착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조장남 단장은 대학 1학년 때 이미 유학을 결심했다. 예술은 감각적인 트레이닝이 핵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국내에서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유일한 대안은 성악과 오페라의 본고장으로 가서 수학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는 유학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전주 기전여고를 포함해서 고등학교에서 4년 간 교편을 잡으며 유학자금을 마련했다. 유학을 떠난 게 1979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유학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특히, 음악 쪽으로 유학을 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유학 기간 중에는 성악을 기본으로 음악해석에 대한 시각을 키웠고 소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시간강사와 전임을 번갈아 하다가 결국 군산대에 둥지를 틀었다. 그의 인생 궤적에 이런저런 부침은 있었을 테지만 변함이 없는 건 청춘부터 지금까지 줄곧 오페라와 함께 한 인생이었다는 것. 앞으로도 조장남 단장과 오페라는 불변의 등식으로 남을 것이다. "오페라는 한 마디로 종합예술이에요. 이게 어려운 게 아닌데... 오페라만큼 이해하고 감상하기 쉬운 게 없어요. 성악도 독창, 합창, 중창이 다 들어가고 기악도 합주, 독주, 여기에 무대미술, 의상, 연극적 요소, 이 모든 게 들어가잖아요. 단지 외국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오페라 역사가 짧아서 낯설 뿐인데..."일반 대중들이 오페라가 단지 서구 예술이라고 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멀리 하는 게 답답하고 안타깝다. 공공 행정도 마찬가지다. 국악의 고장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집착하면서 클래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체장들도 클래식이나 오페라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데, 이건 문화적 편식입니다. 공공행정을 이끄는 수장들이 문화적 편식을 하는 건 절대 좋지 않아요"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도초도에서 태어나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전북으로 와서 서구인의 전유물이던 오페라를 한국적 미학으로 재탄생시키고 있는 조장남 단장. 올 8월 군산대 성악과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오페라에 쏟아 부을 수 있게 되었다. 정년이지만 또 다른 시작을 앞두고 있는 셈이다. "정년 하면 로마 왕래하면서 계속 설득하고 추진해야죠. 로마 바티칸을 비롯해서, 이태리의 주요 극장 그리고 유럽의 주요 국가들까지 '루갈다' 순회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그 스스로 때를 만들어 일구어 왔다. 하지만 정년 이후 오페라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그는 비로소 때를 만난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런 그에게서 칠순을 바라보는 노교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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