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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우리는 그렇게, 구보氏가 된다, 전주에서
신귀백, 김경미 <전주편애(全州偏愛)>
이휘현(2016-07-15 09:34:09)




책을 펼쳐든 순간, 나는 구보氏가 되었다.
1백 년 전 경성거리를 하릴없이 거닐었을 그 구보氏가, 그렇게 나라는 인간과 일체가 되어 전주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그 순간의 전주는 지난 한 세기의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고스란히 보듬고 있었다. 그저 심드렁한 마음으로 지나치던 골목길들에 언제부터 이런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삶의 희로애락을 머금은 그 특별한 전주의 골목길을 거니는 것은, 정말이지 행복한 산책 그 이상이었다.
"묘사를 한 들판은 실제 초록빛보다 더 푸르러야 한다. 자신이 여행한 나라를 묘사할 때는 실제 풍경보다 더 아름다워야 한다."
류시화 산문집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서 재인용한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다. 신귀백, 김경미의 책 <전주편애(全州偏愛)>를 읽으며 나는 이 문장을 떠올렸다. 윤색 혹은 왜곡이라는 말로 폄훼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 그대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들을 발품 팔아 멋들어지게 포장해 낸 두 분의 노고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을 뿐. 제목에 '편애'라는 노골적인 단어를 골라 쓴 것을 보면, 저자들의 의도 또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스쳐갔을 여러 공간들에 시간과 추억의 이름으로 생기를 불어넣은 그 열정은, 웬만한 애정 아니고서는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 <전주편애>는 옛 기억을 더듬어 전주의 시간 풍경을 아름다운 낭만의 순간으로 포착해 낸 멋진 사진첩에 다름 아니다. 그것도 제법 부피가 두툼한 사진첩 말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이 결코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 외려 기쁨과 행복의 순간 보다는 아픔과 절망으로 아로새겨진 시간의 주름살들이 즐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불가역적 그리움 때문일 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가슴 먹먹한 상실감. 그 잃어버린 것들이 어느 순간 그리움이 되어 우리는 기억의 골목길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전주편애>를 더듬이 삼아 활보할 수 있는 전주의 근현대 골목길에는, 지금은 풍남문 달랑 하나만 남아있는 전주의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식민의 쓰라린 기억과 함께 뚫린 신작로가 여전히 건재하며, 음악가 현제명과 이응노 화백의 청년시대가 오롯이 새겨있다. 그리고 한국전쟁 동란의 혼란 속에서 싹튼 영화인들의 열정이 구전되고 있다. 더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아픈 콩나물국밥, 비빔밥, 막걸리 안주상은 한쪽으로 치워두더라도 중국음식마저 맛있다고 소문난 전주의 풍미에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 않은가? 여기에 박배엽, 박봉우, 손상기 등 삶이 곧 시(詩)고 그림이었던 비범한 인물들의 생을 조망해 보는 것도, 우리 일상의 결을 풍요롭게 다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닐는지.
그렇게 우리는, 모두, 전주에서, 구보氏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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