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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인물을 넘어 풍경 곳곳에 새겨진 상실의 아픔
<환상의 빛>
김경태(2016-08-16 10:22:29)





1990년대는 일군의 젊은 일본 감독들이 등장해 해외 영화제를 휩쓸며 평단과 관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그동안 금지되었던 일본문화가 단계적으로 개방되어 일본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그 낯설고도 친숙한 매력에 빠진 관객들이 두터운 팬 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2000년대를 정점으로 해서 일본영화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까지 한국 관객들(과 해외 영화제)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감독은 이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유일해 보인다. 그의 신작인 <태풍이 지나가고>(2016)의 국내 개봉에 앞서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환상의 빛>(1995)까지 뒤늦게 정식 개봉을 했다.

영화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에 대한 꿈으로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어야한다며 집을 나서는 치매 걸린 할머니를 붙잡아두지 못했던 그녀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 꿈속에서 매번 귀환한다. 다행히 그녀의 곁에는 그런 자신을 다독여주는 다정한 남편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은 채 자살을 한다. 그는 무엇에 홀린 듯 철로 위를 걸으며 다가오는 열차를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불가해한 죽음 앞에서 차마 눈물을 흘릴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그러했듯 출근길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으로 남아있다.

영화는 남편의 장례식 장면마저 생략한 채 결연하게 상실과 마주하는 유미코의 현실로 직행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조차 그 죽음을 이해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하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르고, 유미코는 '타미오'와 재혼해 그가 사는 바닷가 마을로 이사를 한다. 차츰 그곳 생활에 익숙해져가면서 더 이상 죽은 남편의 빈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차마 애도되지 못한 의뭉스러운 죽음의 여운은 매 장면마다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아마도 <환상의 빛>은 그의 영화들 중 가장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카메라가 줄곧 인물들을 먼발치에서 관조하기 때문이다. 기껏 근접해서 다가오는가 싶더라도 정적이고 정제된 형식미 안에 인물들을 강박적으로 가둬놓는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은 해외 평론가들이 그를 '오즈 야스지로'의 적자로 지목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레에다 감독이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는 의아할 정도로 카메라의 이동을 절제하고 인물에게 다가가기를 꺼린다. 즉, 그는 손쉬운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적 기법을 극영화에 섣부르게 도입하지 않았다. 꾸며진 인물들을 촬영하는 극영화 카메라는, 현실 속 인물들의 변화하는 진실된 표정 하나하나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관객의 정서적 반응을 유도할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 카메라와는 다른 윤리적 태도와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물로부터 최대한 떨어진 채, 인물들의 표정을 찍는 익숙한 길 대신에 인물들이 어우러진 공간의 표정에 집중하는 어려운 길을 택한다. 서른을 갓 넘은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버린 채 낮은 자세로 진중하게 영화를 영도에서 다시 사유한다. 남편을 잃은 유미코의 눈물을 화면에 담아낼 수 없었던 것도, 나아가 마침내 유미코가 그 죽음과 관련해 억눌러왔던 감정을 타미오에게 폭발하는 순간조차 그들을 익스트림 롱쇼트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리하여 상실의 아픔은 인물의 얼굴이 아니라 집안에서부터 풍경 곳곳까지 새겨진다. 어쩌면 감독은 인물의 진심을 포착하는 자신의 특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간 전체로까지 확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감독의 최근 작품들은 그런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인물들을 멀찍이에서 관찰하다가도 어느새 선뜻 다가가 그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그것이야말로 여전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장인의 품격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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