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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연재 [이 여름, 이 책 한권]
성장을 멈춘 소녀들이 전하는 막연한 슬픔
박정윤의 『목공 소녀』
최기우(2016-08-16 10:28:23)





소설가 박정윤은 색이 분명한 소설가다.
그의 수려한 문장 속 인물들은 낯설지만, 눈길을 줄수록 더 애잔하고 간절하다. 그가 풀어내는 사건도 미분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난해하고 기이하다. 그러나 시점과 서술의 다양한 변화는 인물의 내면에 더 깊이 빨려 들게 하고, 행간의 의미를 더 들여다보게 한다.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품인 장편소설 『프린세스 바리』(다산책방·2012)가 그랬고, 지난해 여름에 출간된 소설집 『목공 소녀』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말할 것이다. 나는 작년에 열여섯 살이었고, 올해도 열여섯 살이고, 내년에도 열여섯 살일 것이라고. 그리고 만약 죽이는 방법을 알았다면 오래 전에 내가 했을 것이다, 라고.'(「목공 소녀」)
『목공 소녀』에는 '소녀'들이 산다. 표제작 「목공 소녀」와 「초능력 소녀」, 「트레일러 소녀」처럼 '소녀'를 제목으로 낸 작품이 여럿이고, 다른 작품의 안팎에도 수많은 소녀들이 살고 있지만, 대부분 어둡고 쓸쓸하고 우울하다. 한 편 한 편 곱씹을 때마다 더 어렴풋하고 아득해진다. 이 소설들에 삶을 얹은 소녀들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속 '소녀'가 아니라, 「프린세스 바리」의 '바리'처럼 상처받고, 유린당하고, 버림받으며 세상의 아픔을 먼저 배워버린 소녀들이기 때문이다.
성폭행을 당하고 죽은 쌍둥이 동생 '수'의 복수를 위해 소녀 행세를 하며 남자들을 낚는 「초능력 소녀」의 '화', 배다른 오빠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는 「기차가 지나간다」의 딸 부잣집 일곱째 '강아', 아빠가 죽은 후 외삼촌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15년 동안 16살 소녀로 살고 있는 「목공 소녀」의 '진이', 아버지가 같을지도 모른다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 「미역이 올라올 때」의 '미랑'과 '미라', '청소년 통행제한구역'에서 또래들에게 환각제를 팔며 부모가 떠난 집을 지키는 「내 곁에 있어줘」의 '소요'… 이들은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으로 존재의 이미를 상실한 채 성장의 기회마저 거부한다. 오히려 '소녀'의 가면을 쓰고 독한 세상에 맞선다.
「프린세스 바리」를 밤새 눈이 시도록 읽었거나 막막한 아픔에 잠시 밀쳐둔 독자라면 『목공 소녀』는 더 반가운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9편의 발표 시기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이지만, 작가는 '작가의말'을 통해 '모두 장편을 쓰기 전에 쓴 것'이라고 밝혔다. 『목공 소녀』 속 '소녀들'의 버거운 고통에 젖어들수록 '바리'가 떠올랐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래 묵고 삭아 장편의 모티브가 된 단편들.
박정윤의 소설 읽기는 미로를 헤매는 것과 같다. 낯선 길을 따라가면 갑자기 익숙한 길을 만나고, 다시 서투르고 생소하고 서먹한 길로 이어진다. 먹먹한 미로에서도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버림받은 이들의 고통을 애써 감싸 안으려는 작가의 의지와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자신만의 글쓰기를 고집하는 작가의 꼿꼿함 때문이다.
박정윤은 자신의 색을 분명히 하며 당차게 쓴다. 흐물흐물한 사람들과 사건들이 유난한 2016년 여름, 우리가 그의 소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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