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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연재 [이 여름, 이 책 한권]
책은 숨어 놀기 좋은 다락방
카슨 매컬러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김정경(2016-08-16 10:30:34)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의 일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대신 친구 따라 점집에 갔다. 난생처음의 경험이라서 지금까지 그 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다. 내가 리트머스 시험 종이처럼 아주 미량의 낯선 언어에도 금방 물이 드는 귀를 가졌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점쟁이는 점집을 나서는 나를 대문 앞까지 따라나서며 "사주에 우울증이 들어있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고, "풀어헤친 머리칼로 기가 다 빠져나가니 머리를 꼭 묶고 다닐 것"을 주문했다. 리트머스 성분의 두 귀는 그녀의 말에 곧 물이 들어서 이튿날 아침 미용실로 달려가 허리까지 닿던 머리카락을 끊어냈다. 겁 많고, 불안하고, 그래서 무기력하고, 자주 우울감에 시달렸던 스물 셋. 그 모든 것으로부터 숨어 놀기 좋은 다락방이 바로 책이었다. 닮고 싶은 작가들의 처녀작부터 한 권 씩 읽어나가다가 지겨워지면 그즈음 마음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채 나를 물들이던 어떤 말들을 책을 찾는 검색어로 써넣었다. 당시 마음의 그물에 걸려든 것이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점쟁이가 나를 카슨 매컬러스에게로 이끈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카슨 매컬러스의 첫 장편소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이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도 스무세 살이었다. 막상 책을 받아들고는 "무슨 책 제목이 이 모양이람." 혼잣말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어디에건, 어떤 색이든 한 번 물이 들고 나면 물들기 전과는 같아질 수 없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미국 남부 작은 마을의 허름한 식당 '뉴욕 카페'를 배경으로 외로운 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에 대한 꿈을 품지만 현실 앞에서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소녀, 믹 켈리.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정치적 개혁을 외치지만 언제나 무시당하고 외면 받으며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가는 제이크 블런트. 평생을 흑인의 인권을 외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흑인들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하며 가족들과도 멀어진 코플랜드 박사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며, 남루하고, 외롭고, 보고만 있어도 우울하다. 그런 그들이 고해성사하듯 기도하듯 찾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내, 존 싱어. 그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의 방문을 무시로 두드린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중간에 끊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존 싱어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더 절실한 게 아닐까. 존 싱어를 통해서 다치고, 닫힌 마음이 위안 받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 소설은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겠지만, 카슨 매컬러스는 존 싱어의 고독에도 역시 주목한다.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가장 친한 친구가 정신병원에 가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정작 그의 얘기를 들어줄 친구가 없다는 절망감. 결국 그것들이 자신을 향해서 방아쇠를 당기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찾아 헤매고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이 소설에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보다 잘 어울리는 제목이 없으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다락방. 책읽기를 통해 나는 티끌만한 일에도 금방 우울해지는 내 성격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의 내 귀는 고구마 싹처럼 빛을 향해, 따뜻함 쪽으로 돋아난다. 다른 사람들의 몇 마디 말에도 금방 파랗게, 빨갛게 물이 드는 내 마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생애 처음 점집에 갔던 때로부터 10여 년 지난 뒤 지금은 머리칼이 등을 지날 만큼 길었다.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다니는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굳이 밝히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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