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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 | 연재 [이 여름, 이 책 한권]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를 꿈꾸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이화정(2016-08-16 10:31:49)





지난 18일 지인 A와 모처럼 만났다. A는 내게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을 건넸다. A는 조직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다 할 위로를 해주지 못했다. 어차피 정답을 찾기 힘든 구조적 한계에 봉착한 상태였으므로, '버티고 또 버티라'는 위로가 전부라는 걸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책에 관한 소개는 몇 개의 에피소드를 담아 문유석 판사의 글을 따옴표 안의 문장으로 인용해 A에 대한 뒤늦은 위로를 전하기로 했다. 
나는 지난 1월 언론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잘한 결정인가? 좀 더 버텨 또 다른 기회가 오길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찌 알겠는가? 사람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는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인생을 살기 때문에.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내 협소한 경험 안에 갇히고 울컥하는 감정에 치우치게 되면서도 다시금 차분히 반성하게 될 때 드는 생각이다." 
저녁식사에 느닷없이 불려나간 자리. 거기서 뒷담화가 많은 조직문화에 지친다는 누군가의 하소연을 들었다. 그것뿐이겠는가? "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강요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 등등"도 포함됐으리라. 그리고 "그건 필연적으로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최소한 그들을 참아줘야 하는지, 왜 가끔은 양보해야 하는지, 때로는 내 자유가 자제돼야 하는지, 때로는 타협해야 하고 또 연대해야 하는지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누가 뭐라 하건 내 방식대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결국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다." 자신의 몫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보하고 타협해야 함을 깨닫는 게 합리성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쉽사리 행복해지지 않는 걸까. 미래를 불안해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 두려워하고, 고위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사회에 절망한다. 양극화, 빈부격차, 불평등 같은 구조적 한계만으로도 힘든데, 우리 사회 특유의 문화가 증세를 악화시켜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왜 개인주의인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에는 공정한 룰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위해 다른 입장을 가진 타인들과 타협하고 연대해야 한다." 언젠가 정의롭고 혜안이 있는 정치적 영웅이 나타날 거라는 환상은 이제 그만 접으시라. 링 위에 올라가야 할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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