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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 연재 [수요포럼]
창조적 글쓰기는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일
163회 수요포럼
도휘정(2016-09-19 09:35:09)




누군가의 필모그래피를 본다는 것은 그가 걸어온 길을 본다는 것. 그의 경험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다.
KBS '생방송 전국은 지금'을 시작으로 KBS '일요스페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집필하고, KBS '인간극장'과 'VJ특공대'를 탄생시킨 방송작가. 세계 최초로 국수를 통해 음식 문명사를 이야기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만들었고, 예능이 판을 치는 시대에 KBS '명작스캔들'과 'TV 책을 보다' '다빈치 노트' '궁금한 일요일 장영실쇼'로 문화나 과학도 재미있다는 걸 알려준 작가. 그의 이름은 한지원이다.


방송작가가 되다
"저는 27년을 방송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았어요. 지금은 거의 왕작가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 일을 하고 있죠. 하지만, 요즘은 예능작가가 제일 잘나가기 때문에 찬밥신세예요. (웃음)"
연세대 신학과 재학 시절, 그는 연극을 했다. 공부 보다는 거리에 나가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1989년, 방송작가가 직업으로서 개념조차 잡혀 있지 않던 시절, 방송작가가 됐다. '어쩌다' 방송작가가 됐지만, 되고나서는 인생에 헛된 시험은 없다는 걸 문득문득 깨닫는다. 특히 '명작스캔들'이란 프로그램을 하며 서구 문명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를 공부한 덕을 톡톡히 봤다. 내가 배운 경험이 글 한 자락에도 배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 한 번도 4대 보험에 가입한 적이 없으며, 프로그램이 끝나는 6개월마다 진로를 고심해야 하고, 방송날짜가 가까워지면 사생활은 없어지는 삶. 특집 4번 하면 1년이 가고, 그러다 보면 친구도 떠나고 가족과도 멀어지는 삶이다. 안정감 없는 삶은 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지만, "27년간 프리랜서 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그의 웃음에서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고집스러움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부심이 전해졌다.
"제가 1997년부터 방송작가 아카데미 강의를 했는데, 그 때는 다큐가 최고였어요. 다큐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다큐적인,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심이 중요한 시대였죠. 지금은 진지한 것을 원치 않는 분위기 때문에 핍박 받는 신세가 됐지만, 사실 다큐는 저에게는 큰 기쁨을 주는 장르였어요. 다큐가 너무 재밌어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었어요. 스크롤이 올라갈 때 내 이름이 나오는 짜릿함, 그걸 느낀 사람은 다시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죠."
그동안 고생한 생각을 하면 철이 이렇게 없나 싶지만,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는 감동은 그를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인간극장'은 평범한 사람이 자기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내 이야기를 만들어 다시 그 사람에게 선사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5주 동안 준비하다 보면 출연자들의 반응이 제일 걱정이지만, "작가님, 어떻게 제 마음을 잘 알고 원고를 써주셨어요?"라는 한 마디에 금세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며 조직폭력배를 만나 인터뷰하고, 'TV 책을 보다'를 하며 소설가 김훈을 만났다. 내가 방송작가를 하지 않았다면 언제 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대단한 작가의 작업실을 가보겠냐는 그가 다큐멘터리를 버리고 드라마를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시대 흐름을 읽다
"교양·다큐 작가로서 저는 스스로를 프로듀서라고 생각해 왔어요. 제가 피디(PD)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피디는 '프로듀서 앤 디렉터(producer and director, 제작자와 연출자)'라는 뜻이잖아요. 새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기획하고 프로듀싱하는 거고, 디렉팅은 현장에서 연출을 하는 건데, 사실 현장에서 디렉팅하는 것은 제가 잘 하지도 못하고 또 체질에 맞지도 않아요. 저는 전체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원고 쓰는 일보다 많이 하는 거 같아요. 그게 방송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장영실쇼'를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앞으로 없어지는 직업에 방송작가는 빠져있더라고요. 방송작가는 살아남는다고 쾌재를 불렀는데, 생각해 보니 거기서 말하는 작가는 단순히 원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창작, 기획을 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 같아요."
그는 기획을 할 수 없는 작가는 오랫동안 생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기획안이 곧 콘텐츠며, 재산이다. 기획안 한 장으로 몇 십억, 몇 백억을 따내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누들로드'다.
'누들로드'는 KBS가 다큐멘터리의 해외 진출을 위해 작심하고 20억 원을 투자한 작품이었다. 결국은 실크로드인 것을 누들로드로 풀어낸 발상의 전환, 그것이 기획력이었다. 그 결과 '누들로드'는 한국방송협회의 '한국방송대상'은 물론, 아이사태평양방송연맹이 주관하는 ABU상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하죠.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게 방송인의 숙명이에요. 새롭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새로운 것을 탐색하려면 우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건 없어요. 지금 현상에서, 지금 현장에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잘 들여다보는 데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어요. 특히 방송은 현장에서 감각을 키워서 시대를 읽는 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기초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이 새로움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곧 기획안의 첫머리, 기획의도가 된다. 이 프로그램이 이 시대에 왜 필요한 지, 방송은 다중을 위한 전파라는 점에서 공익성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글의 접착력을 높여라
"진중권 교수가 영상과 글이 함께 되는 시대에 방송작가가 중요하다는 글을 쓰신 적이 있어요. 솔직히 방송작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아요. 하지만 글이란 어떤 단어나 문장을 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야기의 구조를 만드는 거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탑을 쌓아가는 건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서 어떻게 구체화할 지, 그 탑을 잘 쌓아서 시청자의 감정을 소구 포인트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장르로 생각하지만, 그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것을 재구성해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구조, 즉 탑을 잘 쌓아야 한다. 거기에 사람들은 이야기를 강요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잘 포장하는 수고까지 해야 한다.
"방송작가는 특히나 처음이 중요해요. 시청자를 5분 안에 사로잡아야하기 때문에 막내 작가들은 선배들 프로그램을 가지고 구성을 바꿔보는 훈련을 많이 하죠. 그것이 곧 프로그램의 골격을 세우는 일이거든요."
TV가 '소파에 몸을 기대고 흘러나오는 방송을 그대로 시청한다'는 의미의 '린백(lean back) 미디어'에서 목적의식을 갖고 콘텐츠를 골라보는 '린포워드(lean forward) 매체'로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 뇌리에 박힐만한 강력한 이야기를 만들려면 스토리의 접착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칩 히스와 댄 히스의 공저 『스틱』에 나오는 '스티커 메시지를 만드는 6원칙 SUCCESs'의 법칙을 인용하여 단순성, 의외성, 구체성, 신뢰성, 감성, 스토리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한 것은 단순하죠. 방송작가는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어야 돼요. 이걸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 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죠. 의외성은 듣는 이의 추측 기제를 망가뜨려야 한다는 건데, 뻔한 것을 주의하라는 의미예요. 구체성이란 내가 알고 있으면 남들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하는 '지식의 저주'를 깨뜨리는 법이죠. 여럿이 모였다는 말보다 28명이 모였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다가오죠? 구체적으로 하지 않으면 생동감이 떨어져요. 신뢰성은 시청자들이 내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팩트(fact)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감성적인 메시지는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감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스토리로 이야기하라는 건데요, 인간이 진화하는데 스토리를 통해 구전해 오는 힘이 큽니다. 그게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하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방송작가의 기준으로 잘 쓴 글이란 정보 전달에 충실해야 하며, 자기 말로 풀어야 하며, 자기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전달을 놓치지 않도록 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관심, 창조적 글쓰기의 시작
"배우들 중에 연기가 가장 빛날 때는 돈이 필요할 때라고 하죠? 제가 방송작가로서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도 원초적으로는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내가 일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상황이어서 일을 많이 해야 했고 또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히트 아이템도 생겼죠. (웃음) 그건 기본적인 삶이었고, 그 다음은 흥미였어요. 재미를 잃지 않는 것. 싫증을 잘 내고 변덕이 심한 성격도 한 몫 한 거 같아요."
방송작가를 하는 데 있어 책도 큰 재산이 됐다. 책은 보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반드시 한 가지를 찾아내야 한다. 두꺼운 책 속에서 단 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는 더듬이가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주제가 정해지면 수많은 논문을 찾아보는데, 누군가 연구해 놓은 자료가 없다면 대학교수를 비롯해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을 못살게 구는 수밖에 없다. 그만큼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고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지만, 나의 열정이 눈으로 보이고 프로그램 하나를 완성시켰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제가 했던 것 중에서는 '누들로드'가 대외적으로 가장 큰 프로였는데, 제가 좋아하고 인상적인 프로는 따로 있어요. 난곡이라는 달동네를 기록한 '난곡의 사계'라는 다큐인데요. 신림 7동, 서울대 옆 세상에서 가장 큰 달동네였는데, 80년대에 다 개발하지 못하고 2000년대까지 왔죠. 이 동네가 곧 개발된다는 얘기를 듣고 달동네를 기록해 놓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기획안을 썼어요."
달동네를 기록한다는 것. 그는 이걸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정말 고민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다른 사람과 덜 비교당하면서 다시 힘을 얻어 나갈 수 있는, 지금 나는 난곡 개발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런 야전병원 같은 곳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가난한 사람들도 기대어 살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방송작가가 하는 일을 통해 창조적인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의 경험담은 그의 관심이 사람과 세상에 닿아있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창조적인 글쓰기의 첫 출발임을 전하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가 덧붙인 한마디.
"새 시대는 잘나가는 사람이 열 수 없다고 해요. 지금 못나가는 사람이 새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거죠."
'인간극장'을 통해 평범한 사람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을 만들어 줬던 그가,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음지의 것을 양지로 끄집어냈던 그가, 다시, 누구나에게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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