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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에 대하여
<터널>
김경태(2016-09-19 09:46:13)




자동차 회사 과장인 ‘정수(하정우)’가 무너진 터널에 갇혀버린다. 그가 가진 거라고는 생수 2통과 케이크가 전부이다. 그가 그 고립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전부는 구조를 낙관하며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일 뿐이다. 그의 아내 ‘세현(배두나)’과 딸은 그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구조는 난항을 겪으면서 장기화되고, 설상가상으로 구조대원 한명이 사망하면서 구조 작업을 멈춰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실상은 정우가 갇혀 있는 터널의 추가적인 붕괴 위험 때문에 제2터널 공사가 전면 중단되면서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는 여론 몰이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결국 중단되었던 구조 작업은 정수의 생사가 확인된 후에서 재개되었다. 마침내 한 달이 넘어서야 구출된 정수는 그의 가장 큰 조력자였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의 귀에다가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기자들의 물음에 대경은 “‘다 꺼져버려, 개새끼들아!’라고 이정수씨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수는 대경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런데 불쾌한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 앞에서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너무 무례한 욕설을 한 것은 아닐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는 않을까?

분명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말 그대로, 그 죽음은 장기간의 굶주림 속에서 세포 조직들이 점차 괴사하며 이르는 호흡의 정지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손익을 따지기 위해 그의 목숨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순간, 그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렸기에 이미 상징적으로 죽어가는 중이었다. 존엄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용납할 수 없고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구조를 포기한 순간, 그는 실제의 생사와 상관없이 이미 죽은 것이다. 그는 구조되었지만,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서 구조될 수 있었기에 이미 죽은 채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역으로 말해, 비록 그가 시신으로 발견되더라도 주저 없이 구조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적어도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하고 있음을 각인시켜줬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인물은 세현이다. 공무원으로부터 제2터널의 공사 재개에 동의하는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 그녀는 “살아있으면 어떡하실 건데요?”라고 울먹이며 반문한다. 구조대원의 죽음과 악화되는 여론 앞에서 끝내 구조 중단을 받아들인 그녀는 정수가 차라리 죽어있기를 바랬다. 물론, 그를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닌가라는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겠지만, 나아가 터널 밖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냉정하게 방관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를 바랐고, 그리하여 그들이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수는 포기했지만, ‘인간’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죽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딸은 그들과 부대끼며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한편, 정수의 ‘엄지척’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한 언론은 그것을 자신을 구해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해석하며 감동을 배가시키고자 한다.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려는 휴머니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언론이 자행한 ‘악마의 편집’이다. 정수를 구조하기 위한 근거는 그가 대한민국의 성실한 국민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실이 환기시키는 공감의 휴머니즘 때문이 아니다. 휴머니즘은 인간적인 것을 협상하고 타협하며 한계 지을 수 있는 불완전한 개념이다. 대신 인간으로서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살려내야만 한다. 구조대원은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다가 죽었기에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죽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정수가 죽었다면 그건 무의미한 죽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가 인간이기에 앞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를 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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