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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다시, 정치의 계절이 온다
버니 샌더스의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이휘현(2016-09-19 09:52:50)




'노화(老化)'라는 생물 현상과 '보수화'라는 정치 현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인간은 왜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걸까? 내가 찾아낸 해답은 이렇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 갈수록 인간에 대한 믿음이 옅어진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 본성은 선할 것이다'라는 판단은 생의 그래프가 길어질수록 점점 '인간 본성이 꼭 선하다고 볼 수는 없다!'라는 쪽으로 기울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옅어갈수록, 사람은 보수적으로 변한다.
어쨌거나 이런 복잡한 사색에 잠기게 된 건, 살아온 날들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내가 점점 더 보수화되어간다는 자각에 기인한다. 스물 시절에도 진보의 최전선에 서본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20대 때는 수많은 혁명가들의 삶을 추앙했고, 창작과비평이나 실천문학에서 나오는 시와 소설들을 주로 읽었으며, 이런저런 사회운동에 후원자 형식으로 기웃거렸고, 텔레비전 뉴스를 증오했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턴가 세상에 심드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 건강을 이유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멀리했는데, 지난 대선 이후로는 아예 신문 구독도 끊어버렸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이 사람을 책으로 접하고 나서 다시 심장이 뛰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가 버니 샌더스! 얼마 후 치러질 미 대선의 민주당 후보로 이미 힐러리 클린턴이 낙점된 마당에 이건 완전 뒷북을 치는 셈인데, 나는 이렇게 뒷북치기로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이라는 책을 읽게 된 걸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힐러리 클린턴이 샌더스를 제치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만큼 나는 버니 샌더스라는 인간, 그리고 정치인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지난 해 말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책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은 사실 미국에서는 20년 전에 나온 샌더스의 자서전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6년, 미국 하원의원 4선에 도전하는 무소속 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공고한 양당체제의 후광을 업은 후보들과 긴장감 넘치는 선거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시점이다. 모든 것이 열악한 고군분투의 상황에서 샌더스는 자신이 처음 정치에 뛰어들어 참패했던 1971년 미 상원의원 선거 이후 1981년 미국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 당선, 1992년 미 하원의원 당선 등으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정치역정을 교차해 보여준다.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또한 골수 공화당 지지 지역인 버몬트 주가 버니 샌더스라는 진보정치인을 만나 지난 수 십 년 사이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를, 샌더스는 특유의 유쾌한 필치로 재밌게 보여준다.
놀라운 사실은 정치인 인생 45년 동안 품고 있던 그의 '진보 의제'가 그 긴 세월의 파도에도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 유색인, 동성애자, 낙태 등 미국사회의 주류에 끝없이 억압당해 온 의제들은 언제나 '돌직구 정치인' 샌더스를 통해 다시 정치의 밥상에 오르고는 했다. 1%의 소수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99%의 다수까지 더불어 행복해지길 바라는 그의 지극히 상식적인 진심.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오롯이 품고 있는 한 열정가의 삶. 그 속살을 들여다보니, 다시 내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이렇게 다시, 정치의 계절이 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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