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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살아있는 자, 누구든…
필립 로스, 『에브리맨』
이휘현(2017-01-20 11:24:03)



이른 아침부터 거실에서는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대었다. 그 소리가 어느 순간 불길한 공기를 집안에 퍼뜨렸다. 조심스레 수화기를 든 사람은 엄마였다. 미동도 않던 엄마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미세한 떨림이 엄마의 입술을 감싸고 있었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멍한 시선으로 마당을 내다보고 계셨다. 가족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엄마의 첫마디였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곧 이어진 무거운 침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생애 처음 겪는 육친의 죽음.
엄마와 아버지는 서둘러 외갓집으로 떠나셨다. 그렇게 어른들이 사라진 집에는 남매 넷만 덩그러니 남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누나와 중학생 작은 누나가 초등학생인 나와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막내까지 챙기느라 갑자기 분주해졌다. 나는 큰 누나의 다그침에 몰려 먹는 둥 마는 둥 아침을 뚝딱 해치우고 학교로 향해야 했다. 등굣길에 친구들을 만났고, 마치 무슨 자랑거리라도 생긴 듯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우리 외할아버지 죽었다.." 친구들이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하지만 그 물음엔 현실감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죽음은, 자신들과는 전혀 무관한 다른 세상의 것일 뿐이었다. 어디선가 아카시아 내음이 진하게 풍겨왔다. 5월의 초입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인근 산 이곳저곳에서 아카시아꽃이 만개해 있었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금세 잊었다. 새하얀 아카시아 꽃잎파리 풍경에 홀렸고, 어느 순간부턴가 입에서는 가벼운 흥얼거림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외갓집에서 며칠 묵었다 오실 거라던 큰 누나의 얘기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와! 해방이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그렇게 아카시아 향을 실은 자유의 바람을 타고 내 뇌리에 박혔다. 벌써 30 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여전히 외할아버지의 죽음만 떠올리면 아카시아 향이 기억 속에서 배어나온다. 내가 처음 맞이한 육친의 죽음은, 그렇게 달큰한 향내로 남아있다.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을 읽었다. 읽고 난 후, 어떤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혀 한참을 서성여야 했다.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소설이 내 마음을 왜 이리도 강하게 흔든단 말인가. 이 작품의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죽음'이라는 화두에 휩싸이다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이것이었다. '산다는 게 과연 무얼까…?'
그리 긴 세월도 아닌데, 나이 마흔이 넘으면서부터 자꾸만 살아온 삶의 궤적을 더듬어보게 되는 건 단순히 나의 미련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분명, '살아있음'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작용했을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자, 그 누구든 끊임없이 삶을 욕망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알 수 없다.
소설은 공동묘지라는 공간에서 시작한다. '그'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그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오랜 세월 괴롭혀온 심장병 때문에 결국 다시 건너올 수 없는 강 너머로 떠나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산자들의 추억과 회고. 의례적이든 진심이든, 모든 생의 감각을 잃은 채 관 속에 누워있는 그를 향해 몇 마디의 말들이 전해진다. 그의 둘째부인의 딸 낸시가 시신으로 누워있는 그를 향해 독백처럼 몇 마디 내뱉는다. 그 말들은 어린 시절의 낸시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아버지가 건넸던 진심어린 충고였다.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세요."               - <에브리맨>, 13쪽-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삶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광고업계의 잘나가는 직장인이었으며, 두 번의 결혼 실패로 삶의 주기표에 약간의 주름이 잡혔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온 71세의 남자였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에브리맨'이라는 보석상을 운영했다. 소년에게 그 곳은 보물창고였다. 하지만 그가 집착한 것은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금은보석이 아니라, 시계였다. 특히 아버지가 차고 다니던 오래된 '해밀턴'시계를 소년은 유독 좋아했다. 결국 그 시계는 소년이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생을 다할 때까지 그의 시간을 지켜준 평생지기가 되어준다.
소년은(혹은 그는) 왜 그리도 시계에 집착했을까. 이 물음은 소설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자연스레 해답을 얻게 된다.
삶이 숙명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든 숨 붙어 있는 자들에게 시간은 집착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태어남이라는 실존적 사건이 내 의지가 아니듯, 시간이라는 불변의 흐름 또한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렇다. 태어난 모든 자, 예외 없이 죽는다.
필립 로스는 모든 사람들(에브리맨)이 죽음을 향해 직진하는 불가항력의 풍경을 밀도 있는 문장으로 완성시켜간다. 그래서 여느 공포소설보다도 더 무서운 책이 바로 <에브리맨>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죽음 앞에 선 인간들이 향유하는 '지금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삶을 일시에 뭉개버리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살아있음이 더 절박할 수밖에 없는 생(生)의 아이러니. <에브리맨>은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 필립 로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걸작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도는 음악이 하나 있었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의 <타임(Time)>이 그것이다. 서정적이면서도 유려한 멜로디로 무장한 이 명곡은 삶과 시간에 대한 유한한 생명의 가슴 시린 고백록이다. 그리고 <타임>과 함께 15년 전 이 음악을 소개해 줬던 후배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형, 이 노래 한 번 들어봐요."
아름다운 멜로디인데, 마음이 서늘해지는 건 무슨 조화일까. 그 해 겨울, 이 묘한 음악을 맞이하는 두 청춘의 마음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더랬다. 그 후 둘은 늦은 밤까지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음악을 듣고, 제프 버클리의 목소리에 취해 술을 마시며, 청춘을 토로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는 내게 아주 내밀한 고백처럼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자살했어요. 그것도 두 분 다 젊은 나이에… 난 가끔 두려워요. 내 핏속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불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을까 해서…."
그 후배의 근황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 지난 해 3월이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게 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는 소식이었다. 그 날 밤, 아비들의 불행한 연대기를 비껴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하던 15년 전 그 후배의 두려움 섞인 고백이 끊임없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누구든 떠난다. 다만 그 시간을 모를 뿐이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지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쓰러진 후배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새 나이 한 살을 더 먹어 마흔 넷이 되었다. 언제쯤 나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담담해질 수 있을까. 그 먹먹한 물음에 시달리며 <에브리맨>의 책장을 덮는다. 모두들 잠든 늦은 밤, 조용히 숨죽이며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타임>을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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