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7.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나약했던 남자의 복수극 이중주
<녹터널 애니멀스>
김경태(2017-03-07 12:57:37)



유명 미술관의 관장인 중년 여성 '수잔(에이미 아담스)'의 부유한 삶은 겉보기에 완벽해 보인다. 사실 수잔의 삶은 어린 시절 자신이 그토록 부정해왔던, 어머니를 닮은 자신의 부르주아적 속물성을 인정하면서 달라졌다. 그것은 소설가를 꿈꾸던 가난한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와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의 부유한 남편과 재혼한 계기였다. 그러나 그녀는 삶의 무료함에 빠져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 죽음을 테마로 등장하는 일련의 회화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죽음의 부정성조차 매끄럽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치장하는 예술의 모순성에 대한 자각에서 기원한다. 예술가의 명성을 좇아, 하물며 주름지고 살찐 여성의 나체마저 작품으로 전시해야만 하는 큐레이터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그 고뇌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녀는 그 모순성에 기생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속물적인 삶에 환멸을 느낀다. 거기에다 남편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지면서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부르주아 파티에서 만난 한 친구는 그런 그녀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순성을 즐기라고 조언을 한다. 게이면서 여자와 결혼한 그의 삶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충고이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저 밖의 실제 세상보다는 모순적인 이 세상이 그나마 훨씬 덜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회화 속 세상의 달콤한 판타지와 닮아있다. 그리하여 그의 전언은 곧 탐미적인 예술의 자기반영적 성찰과 맞닿아 있다.

수잔은 애드워드로부터 그가 쓴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제목의 소설을 받는다. 그것은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인들을 향한 '토니'의 복수를 다룬 범죄 소설이다. 그녀는 그 소설을 읽어내려 간다. 이제부터 영화는 현재와 소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폭력적이지만 슬픈 복수극을 직조해 간다. 수잔은 가식을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폭력을 묘사하는 그 소설에 매혹되어 점차 깊이 빠져든다. 더욱이 소설 속 세상은 그녀의 무미건조한 일상과 대비되어 더 아름답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 소설은 현재의 수잔을 정서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에드워드가 함께 보냈던 과거와도 공명한다. 당시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그의 작품을 혹평하며 자신의 테두리로부터 벗어난 소설을 쓰라고 권고한다. 그녀의 눈에 그는 자신의 틀을 깰 수 없을 만큼 나약해 보였다. 그는 그 나약함 때문에 그녀뿐만 아니라 뱃속의 아이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헤어지고 한참 후에야 그는 살해된 가족의 가장으로 변주된 자신의 페르소나를 내세워 훌륭한 작품을 써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치부를 예술로 승화 시켰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예술적 삶에 내재한 모순성의 답습이기도 하다. 나아가 토니는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나약함을 지적하듯이 자신의 나약함을 조롱하는 범인에게 마침내 총격을 가하면서, 에드워드는 오랜 트라우마를 상상적으로 극복한다. 토니가 범인을 죽인 것은 곧 에드워드가 수잔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범죄 소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성장 소설이었다. 그러나 아직 현실 속 에드워드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현실 속 복수의 칼날은 자신을 버린 속물적인 여인을 향한다. 그 소설에 한껏 매료된 수잔은 에드워드의 필력을 재평가 하게 된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그녀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소설을 만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 그 소설은 에드워드가 보낸 최후의 이별 통보였다. 그것을 깨달은 즉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견고한 예술의 아우라로부터 튕겨져 나가며 냉혹한 실제 세상으로 추락한다. 예술의 위장막마저 걷혀지면서 그것의 모순성에 대한 자각이 안겨줬던 지리멸렬함보다 더 견디기 힘든 현실의 민낯과 마주한다. 피한방울 흘리지 않는 세련된 복수극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