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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 | 연재 [수요포럼]
영상전문기자의 현장 이야기
170회 수요포럼_김정환 미디어몽구 대표
(2017-04-28 10:13:33)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렇다보니 기자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도 언론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제 과거처럼 신문사, 방송사 등 전통 언론 매체에 고용되어 보도하는 자만이 기자가 아니다.
블로그 기자로 시작해 '1인 미디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매체로 미디어 몽구가 있다. '1인 미디어'란 개념이 생소할 때부터 활동을 시작해 온 김정환 대표에게 1인 미디어 언론인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블로그 기자로 첫 발을 띄다
미디어 몽구의 시작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사건이 논란이던 시기, 김정환 대표는 대학로에 있는 누나 집에 얹혀 지내며 축구에 미쳐 살고 있었다.
"어느 날에 9시 뉴스에서 황우석 박사가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나왔어요. 그 사건에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있던 때였는데, 집에서 서울대병원까지 걸어서 5분 거리였죠. 그래서 뉴스가 끝나고 강아지와 함께 산책 겸 간 거에요. 그 때 데려간 강아지 이름이 몽구였어요."
그는 핸드폰 카메라로 병원 입구부터 로비까지 언론사들의 취재모습을 하나하나 촬영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 블로그에 올린 그는 다음날 포털사이트 Daum 메인 페이지에 본인의 블로그가 노출된 것을 보게 된다.
"그때 종일 얼떨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사진 캡션이나 설명이 잘못되면 저를 욕하는 댓글도 달리고, 새로고침을 누를 때마다 조회수가 몇 백 개씩, 댓글도 수 십 개씩 달리는거에요. 그런 걸 생전 처음 경험한거죠."
우연찮게 특종이 된 글로 인해 그는 Daum으로부터 함께 블로그 뉴스를 해보자는 제안을 받게 됐다. 그 당시는 블로그 뉴스란 서비스가 처음 시작할 때로, 블로거들이 현장취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취지로 시작된 서비스였다. 김정환 대표는 처음에 나, 친구, 가족, 우리 동네의 이야기가 모두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명인, 정치인들이나 뉴스에 나오고,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정반대인 나와 내 주변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이를 계기로 주변의 이야기를 블로그 기사로 올리게 되었고, '미디어 몽구'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주변에 대한 이야기로 더 이상 올릴 소재를 찾지 못하던 김 대표는 처음으로 취재라는 걸 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현장을 찾아나갔다. 그 곳은 집에서 보도로 30분 거리에 있는 일본대사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정기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
"첫 취재원은 고 황금주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일본 정부보다 우리나라 정부를 더 원망하고 계셨죠. "한국정부는 우리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 전까지는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며 살았거든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들이 할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미디어 몽구는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계속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소식 전달 뿐만 아니라 함께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할머니들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직접 활동하고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미디어 몽구는 그렇게 독자적인 '1인 미디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디어 몽구'가 세상에 알려지다
미디어 몽구가 언론에 알려진 계기는 시작하게 된 계기만큼 우연찮다.
2006년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 운행 중 발생한 추락사로 안전점검이 있은 후, 놀이공원을 무료 개장하는 일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왜인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무료 개장을 하면 아이들이 많이 오겠죠. 더군다나 주말이었으니까요. 근데 그게 느낌이 이상한 거에요. 뭔가 사고가 발생할 것 같았죠. 그래서 당일 지하철 첫차를 타고 현장에 갔어요. 아니나 다를까 첫차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각 출입구마다 친구들과 같이 온 어린이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아이들은 계속 몰려드는데 안전요원이나 경비원들은 보이지 않았죠.
결국 너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예정시간보다 30분 일찍 개장을 했죠. 그 순간 아이들이 서루 들어가려고 하다 대형 압사사고로 번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 발생 했어요. 아이들이 넘어지고, 깔리고, 친구를 잃고, 119에 실려 갔죠. 그러한 상황이 끝나갈 쯤 안전사고 재난문자가 왔어요. 현장에는 언론 또한 없었죠."
그 상황을 촬영했던 미디어 몽구는 종일 실시간 검색어와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러한 일을 겪으며 김정환 대표는 본인만의 취재원칙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항상 현장에 일찍 가고, 끝까지 남겠다는 것. 특히 시작과 끝날 쯤 돌발 상황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여러 특종을 취재할 수 있었다.


'1인 미디어'의 발판을 만들어가다
우리나라에 '1인 미디어'란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 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미디어 몽구는 기자신분을 인정받지 못한 채 취재를 해야만 했다. 이는 밖을 취재할 때는 괜찮았지만 실내에 출입해야 할 때는 달랐다.
"가장 힘들었던 건 행사나 기자회견 같은 실내 출입이 있을 때 언론사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기존 기자들에게 무시당하는 거였어요. 저는 촬영을 주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내에서는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기자들은 기자도 아닌 제가 취재를 하려고 하니 못마땅하게 본거죠. 결국 주최 측에게 쫓겨나는 일도 진짜 많았어요."
그렇게 어려운 활동을 이어오던 와중에 미디어 몽구가 하나의 언론으로 인정받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2007년 KBS 세계공영방송총회에서 대안언론을 주제로 한 방송의 주인공으로 낙점 된 것. 아직 우리나라에 대안언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시기에 새로운 언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지금은 김정환 대표의 멘토가 된 최필곤 PD를 이 때 담당PD로 처음 만나게 됐다.
이후 기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먼저 다가가며 미디어 몽구의 존재를 각인시켜 나갔다. 이제 미디어 몽구는 현장에 나가면 오히려 기자들이 먼지 인사를 건네고, 청와대를 제외한 어디든 출입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게 됐다. 1인 미디어에 대한 대우와 시대가 많이 바뀐 것이다.


배고픈 길을 걷다
2008년 촛불시위는 이전의 미디어 몽구와 이후의 미디어 몽구는 달라지는 기준이 됐다. 한미FTA 반대 촛불시위에 취재를 나간 미디어 몽구는 경찰의 과잉진압을 보며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게 된다.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과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고, 날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놀랐어요. 이전까지는 취재를 해서 돈 받는 목적이 더 컸다면, 이 때 저 스스로 기록의 중요성을 깨달은 거에요. 국가가 국민의 목소리를 탄압하려고 하는 상황을 기록해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이때 언론보다 네티즌들에게 미디어 몽구를 알리게 됐어요."
그렇게 미디어 몽구는 촛불시위를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기록하며 스스로 '시대의 기록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된다. 특히 미디어 몽구는 시위 당시 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비중 있는 순간들을 기사로 쓰며 네티즌들의 신뢰를 얻게 된다. 같은 현장에 있었던 언론과 미디어 몽구의 취재 내용이 조금은 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전까지 기자들로부터의 무시와 함께 김정환 대표를 힘들게 했던 것은 네티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항상 제가 뭘 올리면 끝에 물음표가 따라 붙었어요. 이게 사실이 맞냐는 거죠.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취재를 하고 보도를 하면서 절대 인터넷에서 자료를 퍼오거나 남이 찍은 사진은 쓰지 않아요. 사소한 사진 한 장을 사용해야 하더라도 꼭 현장에 가서 직접 촬영해서 사용하죠. 그래야 자신 있게 올릴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고, 반론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저의 노력이 처음에는 물음표를 달던 네티즌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된거죠."
하지만 이후 그 당시 Daum의 정책이 '우리들의 UCC 세상'으로 바뀌며 동영상을 키우기 시작했고, 시사분야보단 흥미위주의 콘텐츠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김정환 대표는 배고픈 길을 걷기 시작하며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은 다 그만두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시사분야의 상을 휩쓸었지만 상보다는 상금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본인이 투자한 열정과 젊음을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묵묵하게 1인 미디어의 길을 걸어오게 되었다고.
"돌이켜보면 그 때 저는 배고프고 돈은 못 벌었어도, 사람을 벌었어요. 블로그에 광고 문의가 몇 차례 들어왔지만 거절했어요. '다른 블로거들은 다 하는 광거를 왜 쟤는 거절하지?'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미디어 몽구에 하나의 브랜드 가치가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이상하거나 무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달리 봐주기 시작한거죠. 또 권력보다 사회적 약자분들을 많이 찾아다녔기 때문에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1인 미디어는 추적이나 탐사보도는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언론들과 역발상을 하며 저만의 길을, 영역을 마련했어요. 예를 들면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망언을 하면 대부분 일본 쪽에 대해 분노하지만, 저는 반대로 피해자인 할머니들에게 먼저 찾아간거죠."
김정환 대표는 배고픈 활동을 이어가던 중 해직언론들이 모여 만든 뉴스타파에 초창기 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현장파인 그가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은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뉴스타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며 다시 미디어 몽구로 돌아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런 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길은 아니기에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앞을 보고 간 것이 아니라 항상 땅을 보며 뚜벅뚜벅 걸어갔죠. 사람들이 물어봐요.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저는 지금까지 온 것처럼 앞보다는 그저 뚜벅뚜벅 걸어가며 장벽을 헤쳐나갈거에요.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게 제 목표이고, 지금까지는 그 꿈을 이루면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미디어 몽구는 현재 그를 지켜보며 묵묵히 응원해주는 많은 분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마음 편히 세상을 기록하고 있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계속 활동하겠다는 그. 훗날 미디어 몽구라는 홈페이지가 온라인 역사 박물관이 됐으면 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라고.


미디어 몽구의 원칙
김정환 대표는 지난 10년이 넘도록 활동하며 미디어 몽구만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남을 깎아 내리면서 본인을 치켜세우지 않는다. 경쟁 속에서 더 많은 조회수, 댓글과 관심을 받기 위해 압박감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미 그런 기록을 갱신해본 그는 이젠 협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욕심내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자는 원칙을 갖고 있다. 영향력이 커지다 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사람이 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상식에서 수상자들은 종종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하지만 초심을 지키는 경우를 보기 여럽다. 그렇기에 김정환 대표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세 번째로 그는 현장에서는 입보다 귀를 열고, 약자의 곁에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가해자의 분노보단 피해자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태도라 말한다.
미디어 몽구가 인정을 받으며 언론인 지망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진 김정환 대표는 학생들을 만날 때만다 스펙보다는 경험을 쌓으라 조언한다.
"그저 보고 듣는 것보다 직접 만지며 익히는 것이 사회에 나와서는 더 큰 힘이 되요. 그리고 저는 항상 현장에 나가서 일할 때 그것이 집안일이고, 만나는 분들은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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