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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살고자 하는 열망, 그것이 바로 ‘품격’이다
이광재 『나라 없는 나라』
이휘현(2017-05-19 15:09:06)



봄기운 완연한 건지숲을 거닐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이리도 아름다운 꽃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지 몇 해나 되었을까..?’
벼락처럼 찾아든 상념에 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내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살아있음의 기쁨은, 기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소한 듯, 허나 결코 소소하다 할 수 없는 설렘의 풍경은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흔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눈 뜬 장님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러면서 일상이 팍팍하다 한탄한다. 미련함 앞에서는 이렇듯 답이 없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건지숲(이 곳은 산이라기보다는 숲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에서 나는 그렇게 제대로 봄을 맞이했다. 가슴이 열리면 눈도 맑아지는 것일까. 봄의 여흥으로 나는 책읽기마저 더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지난 몇 주간 종이의 묵은 내음을 통해 펼쳐진 내 설렘의 기록을 일별해 보자면 이렇다.
우선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다. 잭 런던의 <야성의 외침>이 뒤따랐고, 스티븐 킹의 초기작 <롱 워크>가 바로 뒤를 이었다. 책을 세상에 선보인 시점으로 따지자면 3백 년, 1백 년, 4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읽는 재미로만 보면 이 세 권 중 어느 것 하나 처지는 것이 없었다. ‘잘 읽힌다’는 단순한 명제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힘을 발휘한다. 앞에 언급한 세 권의 연속된 읽기는 그 사실을 내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내 독법에 의하자면 이 세 권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 있었는데, 그 강렬한 느낌이 독서의 재미를 배가시켰던 듯하다. 그렇다면 그 일관된 주제가 무엇이냐고? 다름 아닌 ‘살고자 하는 의지’,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3백 년 동안 인류에게 사랑받고 또 끊임없이 변주되어 선을 보여 온 로빈슨 크루소의 생존기야 꼭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하지만 28년 넘게 무인도에서 고투해 온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은 주변의 흔한 동화책이나 만화책이 아니라, 디포의 원본을 고스란히 옮긴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완역본으로 읽는 게 제격일 듯하다.
‘벅’이라는 이름의 개를 주인공으로 삼아,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생명의 비루함이 아니라 바로 품격이라는 사실을 설파하는 잭 런던의 출세작 <야성의 외침>은 정말 끝내주게 매혹적인 소설이다.
그리고 전 세계 3억 부 이상의 책을 팔아치웠다는 미국 공포문학의 대가 스티븐 킹이 십대 시절에 쓴 장편소설 <롱 워크>. 이 작품 또한 최근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끈 틴에이저 서바이벌 장르 <헝거게임>이나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원류라 할 만 한데, 스티븐 킹 특유의 ‘술술 읽히는 마법’이 이 소설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미래 어느 시점의 독재사회, 지배자의 호출에 의해 길 위에서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100명 소년들의 서바이벌 게임, 그리고 이를 오락처럼 관전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에 대입하면 그 지독한 입시공화국의 풍경에 대한 우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재밌는 소설이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나 이 세 권의 소설만으로 나의 지난 몇 주가 보람찼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모니터 앞을 응시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며칠 전 끝내 ‘살고자 하는 의지’의 어떤 끝판왕 같은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그 여운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역의 작가 이광재가 쓴 <나라 없는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백성을 위하여 한 번 죽고자 하나이다”
- <나라 없는 나라>, 10쪽-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이름을 누가 모를까. ‘동학’이라는 1백 20여 년 전 거대한 함성을 그 누가 기억에서 지울 수 있을까. 낯설지 않은 그 고유명사들 앞에서, 그런데 우리는 정작 할 말이 풍성하지 않다. 이 가난한 기억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막연하게 알고 있다는 것과,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그 강을 건너는 일, 쉽지 않다. 시간은 자꾸 앞으로 달려가고, 등 뒤에 남겨진 망각의 강은 폭을 더해간다. 이 서글픈 풍경에 어느 날 쪽배가 하나 놓이게 되었다. 힘줄 튀어나온 한 명의 사공에 의지해 이 쪽배는 드넓은 강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내가 <나라 없는 나라>를 읽으며 끊임없이 머릿속에 그려본 이미지가 이러하다. 당연지사, 쪽배는 소설이고 사공은 작가다. 이 위태로운 도하의 풍경을, 나는 끝내 묵직한 여운으로 아로새길 수 있었다. 내 눈은 다시 책의 첫 페이지를 훑기 시작했고, 그렇게 지금은 두 번째 읽기가 진행 중이다. 첫 번째 독서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두 번째에서는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불행한 현실에 맞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그 패배의 과정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중심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의 실존인물들이 있고, 을개, 더팔이, 갑례, 탄묵 스님 같은 가상의 인물들이 더해져있다. 작가는 그들 각자의 내면 풍경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고민을 세밀하게 펼쳐간다. 그리고 그들의 어지러운 마음들이 당시의 생활상과 지리에 대한 꼼꼼한 고증을 통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피어난다. 소설가 이광재는 동학이라는 도도한 물결을 거대한 벽화 대신 이렇게 촘촘한 세밀화로 완성해 내었던 것이다. 두 번째 독서가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설의 말미는 관군에 크게 패해 흩어진 동학군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그들의 열망은 죽음도 불사하는 강렬한 의지를 통해 산화한다. 그 상실의 심연을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야 했던가. 문득, 망각이라는 쉬운 해답으로 모두들 도피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할리우드에서 만든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큰 인기를 끌었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파리 꼬뮌의 절망을, 그렇게 쓰러져간 자들의 꿈을 보며 많은 이들이 눈물 흘렸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그 눈물은,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을 담고 있었다. 쓰러진 자들의 꿈이 거리 이 곳 저 곳에서 지금도 여전히 흩뿌려지고 있음을,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잊고 살았다. 파리 꼬뮌 만큼이나 치열했던 120년 전 우리들의 뜨거웠던 이야기를.
그리고 그 즈음, 전광석화처럼 소설 한 권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4.3 제주에 현기영과 김석범이 있었듯, 5.18 광주에 임철우와 김남주가 있었듯, 1백 년 전 전라도 너른 들판 동학의 함성 속에는 이광재가 있다. 근자에 활발해진 소설가 이광재의 행보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문학이 건져 올린 큰 수확이자 한국 근대사 연구의 축복이기도 할 것이다. 이광재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이유다. 우선은 <나라 없는 나라>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읽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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