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7.6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유령처럼 떠도는 여성, 남성 중심적 사회에 균열을 내다
<세일즈맨>
김경태(2017-06-30 15:41:11)



영화는 보통 두 시간 남짓 동안 지속된다. 당연하게도, 감독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보여주고 또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를 신중히 취사선택해야 한다.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세일즈맨>은 서사의 전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러니까 관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감독은 그 시간을 아껴, 사건의 여파가 불러온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에 집중한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표정, 그리고 침묵 속에서 암시적으로, 혹은 모호하게 분절되어 있는 그 사건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는 부인 '라나(타라네 앨리두스티)'와 함께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에 주인공 부부로 출연 중이다. 그들은 무너질 위기에 놓인 건물로부터 나와 급히 새 집을 찾는다. 다행히, 같은 연극에 출연 중인 동료가 소유한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이전 세입자 여성이 남겨두고 간 짐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 여성은 집을 구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짐을 겨져가기로 한 약속을 차일피일 미룬다. 급기야 그 여성이 다수의 남성들과 문란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소문마저 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온 줄 알고 무심결에 문을 열어놓고 샤워를 하던 라나는, 전에 살던 여성을 찾아 온 어떤 남성과의 몸싸움으로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그 사건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어 부부 생활은 삐걱거린다. 현실은 연극과 공명하며, 부부는 조금씩 다른 호흡과 대사로 연극에 균열을 일으킨다.

본의 아니게 라나를 곤란한 상황에 빠트린 그 여성은 영화 속에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란 사회에서 성적으로 난잡한 여성의 재현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여성은 남성들에게 휘둘리고 가시성마저 빼앗기며 그렇게 두 번 억압된다. 그녀는 남성들의 성적 대상이자 이웃들의 혐오 대상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란 사회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마녀일까, 아니면 이란 사회가 감추고자 하는 추악한 이면의 폭로자일까? 공백으로 남은 채, 그녀는 더 깊이 은밀하게 영화 속에 스며들어 서사를 추동한다. 마치 공포영화 속 유령이 그러하듯, 그녀는 등장인물들 사이를 떠돌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존재를 용인 받을 수 없었던 여성은 라나의 신체를 빌려 귀환한다. 라나는 그녀 자신을 넘어 이란 사회의 모든 억압받는 여성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침입한 그 남자가 라나를 누구로 판단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라나는 그 여성으로 오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부적절한 태도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지식인이자 예술가로서의 품격을 지닌 에마드는 금이 간 건물로부터 빠져나가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몸이 불편한 이웃을 챙길 정도로 양심적이고 용기 있다. 아울러 이란 사회에서 남성을 향한 여성의 시선이 얼마나 부정적인지도 잘 알만큼 사려 깊다. 그러나 아내가 겪은 그 뜻하지 않는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잔인한 복수를 꿈꾸며 숨겨뒀던 예의 그 폭력적인 남성성을 드러낸다. 이제 그는 여타의 이란 남성, 즉 라나를 다치게 했던 그런 남성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라나는 마침내 마주한 그 남성에게 복수하려는 에마드를 말린다. 복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일 뿐이다. 그녀의 내면 깊은 상처는 그 특정한 남성 개인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여성을 괴롭히며 유령으로 만드는 것은 그 견고한 남성중심적인 사회 그 자체이다. 그녀가 원치 않는 잔인한 복수는 여성을 재차 소외시킬 뿐이다. 라나는 눈물을 흘리며 홀로 그 남성들만의 싸움으로부터 쓸쓸히 빠져나온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와 에마드는 여느 때처럼 다시 연극무대에 오른다. 현실은 그들의 연극을 또 얼마만큼 흔들어 놓았을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