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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6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책 읽기는 쓸모 있는가?
김영란 『책 읽기의 쓸모』
이휘현(2017-06-30 15:45:00)



나이가 사십대 중반에 가까워지다 보니, 앞날에 대한 기대와 걱정 이상으로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도 쌓여간다. 백세 인생 시대에 웬 궁상이냐 싶겠지만, 내 정신을 지배하는 감성 자체가 우울한 잿빛이라 피할 도리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시간에 조바심을 내왔다. 그 시작점은 아마도 옆자리를 지켜주던 짝꿍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린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이 아닐까 싶다. 예민한 사춘기 소년은 그 날 이후 '죽음'을 앓기 시작했다.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고, 피도 눈물도 없이 째깍째깍 전진해 가는 시간의 벽 앞에서 나는 남몰래 배갯잇을 적셔야 했다. 그리고 끝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곤 했다. 그렇게 소년은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사반세기 이상을 '우울한 아이'로 살아왔다.
하지만 짝꿍이 내게 남긴 유산은 '죽음에 대한 공포' '유한한 시간 앞에서의 절망' '잿빛 우울' 등으로만 정리되지 않는다. 친구의 갑작스런 부재는 나에게 세상의 풍경을 남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감성을 건네주었다. 그 자산의 팔 할은 독서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무수한 공포의 밤을,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두려움의 공기를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책이 나를 살렸다.
그러므로 나의 이십대 시절 대부분이 책으로 채워질 수 있었던 건,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찾아온 친구의 죽음이 나에게 건넨 저주이자 축복이기도 할 것이다. 가난한 청춘의 허허로운 지점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수많은 책들을 통해 내 영혼의 방황이 풍요로울 수 있었다. 내가 나의 이십대에 별다른 후회가 없는 이유다.
하지만 만만찮은 직장 스케줄 탓에 삼십대 이후의 내 일상에서 책 읽기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십대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삶의 주기표 속에서 독서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하지만 나의 책 욕심은 여전하다. 비록 이십대 시절만큼 펄펄 끓어오르는 건 아니겠지만….
결국, 삶의 연료를 채워주기 위해 나는 요즘도 가끔 서점을 찾는다. 잔뜩 꽂혀있는 형형색색의 책표지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눅진한 종이 내음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며칠 전 집근처 동네서점을 찾은 이유도 그렇게 내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곳에서 흥미로운 책을 하나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책 제목이 눈에 쏙 들어왔다. '책 읽기의 쓸모'. 그 이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책을 쓴 사람이었다.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면 잘 몰라도 '김영란법'이라고 하면 모른다고 할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법조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워져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법이 지난 해 한국사회에 몰고 온 파장을 과소평가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짐작하다 시피 김영란법의 입법에 힘 쓴 사람이 바로 김영란이다. 그런데, 삼십년 넘게 법조인으로 살아온 그가 낸 책의 소재가 '법'이 아니라 '책 읽기'라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서점에 들렀던 그 날, 나는 주저 없이 책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저는 책 중독, 활자 중독에 가깝습니다. 집에 있는 활자란 활자는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고, 어떤 책도 한번이라도 훑어보지 않고는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요즘은 책이 너무 많아져서 다 훑어보지는 못하지만 한동안은 그랬습니다.
 - 김영란,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 20쪽 -


150페이지 분량의 강연집 <책 읽기의 쓸모>는, 빡빡한 직장 스케줄에 수십 년 간 쫓겨 온 非문학인이 책을 삶의 자양분으로 활용해 온 것에 대한 일종의 느슨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책 관련한 정보가 빼곡히 들어찬 것도 아니고, 무슨 신선한 발상이 녹아있는 것도 아니다. 모범생으로 자라 모범시민으로 삶을 일궈온 무난한 인생의 한복판에서, 김영란은 자신의 독서경험을 통해 채색한 감성의 속살을 슬쩍 내비칠 뿐이다.
그 안에 <작은 아씨들>과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과 톨스토이, 미셸 투르니에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작가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법'이라고 하는 삭막한 영역에서 종종 빠져나와 책을 통해 사람과 세상의 숨결을 보듬으려 한 김영란의 고투. 그 이중적인 삶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강연집이지만, 곳곳에 책 읽기의 즐거움이 옛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하게 박혀있다.


저는 제 삶을 가지고 스스로 이분법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왔으니까요. 법원에 가면 남의 사건을 열심히 연구하는 법률가로 일하지만, 집에 오면 전공이나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만 읽었습니다. 저는 책 읽기와 직업을 늘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꼭 읽어야 하는 법률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댓가가 돌아오지 않는 책들만 읽어왔으니까요.
- 김영란, <김영란의 책 읽기의 쓸모>, 71쪽 -


정확한 연도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대학교 1,2학년 때쯤이 아니었나 싶다. 한참 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매일 같이 책을 붙들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가 무심코 이런 말을 던지셨다.
"얘야. 책 좀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
가만히 있다가 자꾸 귓가에 남아 맴돌던 그 말 때문에 어느 순간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대체 책 읽기는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이란 말인가. 책 읽기와 공부의 경계는 어디서 그어져야 하는 것일까. 그 모호함에 어리둥절해져버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그 때 어머니의 질문 속에는 책 읽기의 '쓸모'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책만 읽어대는 나를 향해 '책버러지'라며 혀를 끌끌 차시고는 했다.
맷집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인지 몰라도, 나는 2의 숫자로 시작되는 나이의 십년 동안 단 한 번도 취업 원서를 작성해 본 적이 없었다. 2의 뒤에 붙은 숫자가 커갈수록 부모님의 한숨 소리도 커갔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없이 책만 읽었다. 그렇게 집의 한 구석에서 책들은 대책 없이 쌓여갔다.
그리고 3의 숫자로 시작되는 나이에 이른 어느 날, 나는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취업 준비를 선포했다. 황당해하시는 부모님에게, 나는 몇 달 후 방송국 합격 소식을 전해드렸다. 얼마 후 90칸짜리 책장이 집으로 배달되었고, 분별없이 쌓여있던 책들은 그 책장 속에 마치 훈장처럼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찾아 온 부모님의 친구들에게 전시되었다. 이제 그 책들은 취업에 성공한 아들의 일등 공신 대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과연, 책 읽기는 쓸모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명쾌하게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평생 찾지 못할 해답인지도 모른다. 다만, 책 읽기가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해준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오늘 밤에는 무슨 책을 읽어볼까.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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