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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인간보다 더 인간을 믿는 神,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다
원더우먼
김경태(2017-07-24 14:02:21)



할리우의 슈퍼히어로들은 동시대를 넘어 인류의 굵직한 현대사에 개입해 그것을 다시 써 왔다. 일찍이 마블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의 '엑스맨'들은 60년대 냉전시기로 회귀해 미국과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조장하고 또 해결하는 장본인이 되고, <퍼스트 어벤져>(2011)의 '캡틴 아메리카'는 2차 세계 대전의 전쟁 무기로 개발되어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을 배가시킨다. 구체화된 시대적/공간적 배경 속에서 슈퍼히어로들은 익숙한 사건들을 환상적으로 재구성하거나 인류의 오랜 트라우마를 어루만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DC의 '원더우먼'은 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유럽으로 향한다.

'제우스' 신과 '아마존'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원더우먼 '다이애나(갤 가돗)'는 그만큼 아마존 여전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신체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모두 사라진 시대에 전쟁의 신 '아레스'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신적인 존재이자 슈퍼히어로이다. 다이애나에게 그는 절대적인 악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녀에 따르면, 전쟁은 인간 탓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기 때문에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지 않는다. 인간의 탐욕이 아니라 아레스의 인간 혐오가 전쟁의 원인이다. 그는 인류를 전멸시키기 위해 인간의 악한 면을 부추겨 전쟁을 지속시키고 있다. 선량한 인간들이 그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다. 다이애나는 바다에 불시착한 영국군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를 따라 전장 속으로 뛰어들어 아레스를 없애 전쟁을 중단시키고자 한다.
전쟁의 원인은 더 이상 국가 간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다. 1차 세계 대전의 대결 양상은 연합군과 독일군의 대립을 벗어나며, 따라서 실제 역사에처럼 독일의 항복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물론, 민간인들을 향한 무차별 공격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야심을 지닌 독일의 전쟁광 '루덴도르프 장군(대니 휴스턴)'은 악의 한 축을 담당하지만, 그의 죽음은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아레스의 꼭두각시로서 선량한 피해자이다. 결국 보다 선명한 대립은 인간을 신뢰하는 신과 그렇지 못한 신이다. 그 사이에서 휘둘리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전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덜어낸다.

사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개발을 빌미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은 '기생충'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레스의 입장으로, 탈인간적인 사고에 기반한다. 그는 인간을 심판하는 신으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징후로 읽을 수 있다. 아레스가 지구를 위한 신이라면, 다이애나는 인간을 위한 신이다. 다이애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오로지 인간에게 선한 신이다. 하물며, 그녀는 치명적인 독가스를 개발하며 루덴도르프에게 부역한 '포이즌 박사(엔레나 아나야)'를 살려둔다. 그녀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의 생존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롯이 그 신들의 손에 달렸다. 전쟁을 막기 위한 다이애나의 저돌적인 태도에 트레버도 감화되어간다. 그는 독가스를 가득 실은 비행기를 강탈해 공중에서 폭파시키며 죽음을 자초한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다이애나의 휴머니즘을 뒷받침한다. 문자 그대로, 인간인 그는 신인 그녀가 욕망하는 인류 구원의 화신이 된다. 그는 신이 보여준 인간을 향한 믿음에 감응된 것이다. 아레스와의 최종 결투에서 밀리던 그녀는 그의 죽음 앞에서 분노를 폭발하며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마침내 그녀가 아레스를 물리치자 독일 군인들은 선량한 인간으로 돌아와 서로를 챙긴다. 실제 역사와 달리 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은 신의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 나아가 아레스의 소멸은, 재차 현실과 다르지만 인간 세계에서 전쟁이라는 살육 행위의 영원한 종식을 기대하고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신이 외치는 반전의 목소리는 찬란하지만 공허하다. 역사의 왜곡 아닌 왜곡, 혹은 탈역사화는 인간을 단순화하면서 반전의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투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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