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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나는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이휘현(2017-07-24 14:05:27)



그 날은 낮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나는, 친구 둘과 해가 채 떨어지기 전부터 막걸리집에 들어가 시간을 축냈다. 어디선가 재밌는 일이 뚝 떨어지길 바랐지만, 우리 셋은 세상에 어둠이 짙어가도록 청승맞은 몰골을 씻어내지 못했다.
그 때였다. 술집의 문이 열리고, 우리 또래의 여자 셋이 들어와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 셋, 그리고 남자 셋! 가라앉았던 술자리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선은 저 창가 쪽 세 명의 여자들에게 계속 붙들려 있었다. "인연이라는 거…, 원래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거잖아!!" 비, 술집, 여자, 밤, 그리고 청춘. 어지러운 낱말들이 뒤엉키면서 우리의 쑥덕거림은 끊임없이 삼류 소설을 써내려갔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우리의 조바심도 커갔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왔음을 우리는 어느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가 먼저 도발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녀들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 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한 친구가 근처 문방구에서 큼지막한 스케치북과 볼이 두툼한 펜을 하나 구해왔다. 구애의 글은 나의 몫이었다. 이 또한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우연과 운명을 설파한, 거기에 비 오는 날씨를 핑계 삼은 그렇고 그런 미사여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창 밖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술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가 길 건너편에서 우산을 폈다. 나머지 한 친구가 메신저 역할을 하기로 했는데, 우선 스케치북의 메모를 보기 좋게 찢었다. 그리고 길 위에 고인 빗물에 적신 다음 그녀들이 바라보는 창문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주저의 시간도 없이 그녀들이 내다보는 창문 밖에 젖은 종이를 딱 붙이고 돌아서는 그 친구의 얼굴에는 승리의 표정이 새겨있었다. 무모하니까 청춘이다! 우리는 우산 밑에서 그녀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비는, 밤이 깊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빛바랜 추억의 한 페이지가 시간의 먼지에 덮여 있다가 툭 튀어나오게 된 시점은, 잭 케루악의 장편소설 <길 위에서>를 읽던 어느 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아니 나의 청춘에도 즐겁고 엉뚱한 추억은 많았다. 세상 눈치 보지 않고, 내 멋대로 내 삶에 그리고 욕망에 충실했던 순간들. 나는 왜 그 시간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일까?
<길 위에서>는 1957년 미국에서 출간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 우리 식으로 하자면 환갑의 나이를 맞이한 오래된(?) 소설이다. 잭 케루악이라는 무명의 작가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이자, 1950년대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문화 아이콘으로, 1960년대 히피세대에게는 무한한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했던 당대 젊은이들 사이의 문제작이다. 영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20세기의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으며, 지금도 매해 전 세계 수십 만 부가 팔려나가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이 정도 위상이면 권위(무슨 문학상이나 무슨 무슨 언론 선정 명저 등등)에 유독 마음을 의탁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제법 알려졌을 법 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평범한 한국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잭 케루악이라는 이름도, <길 위에서>라는 책 제목도 모두 생소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혹 무라카미 하루키 애독자라면 그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몇 차례 이 책 제목이 언급되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지난 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논쟁의 중심에 섰던 가수 밥 딜런의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Chronicles by Bob Dylan)>에서 언급된 어느 한 대목? 어쨌거나 한국의 독서시장에서 잭 케루악과 그의 대표작 <길 위에서>가 가진 성적표는 초라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글을 써 갈기고 보니, 얼마 전 이 소설을 읽은 내가 무슨 대단한 독서가인 양 떠벌린 꼴이 되어버렸다. 아니꼽게 보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이왕 이 소설을 읽은 마당에 좀 솔직한 마음을 꺼내보자면, 나는 남들이 갖지 못한 큼지막한 보석을 하나 수중에 넣은 것처럼 황홀한 기분에 젖어 있다. 2만 원 남짓한 돈을 투자해 이렇게 짜릿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건 내겐 너무나 큰 행운이다. 더불어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내 청춘의 기억들까지 보물창고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이 좋은 기분을 이 지면의 독자와 함께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소설 <길 위에서>의 얼개는 단순하다. 샐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의 20대 주인공이(그는 대학생이자 무명작가다) 총 네 번에 걸쳐 미국을 동에서 서로, 또 남으로 종횡무진하는 이야기가 다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흔히 배운 기-승-전-결의 구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마치 의식의 흐름에 맡겨 수다를 떨 듯 길 위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상황극이 이 소설 <길 위에서>의 전부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건, 작품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무슨 위대한 교훈이 들어있냐고? 천만의 말씀.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진행되는 등장인물들의 미 대륙 가로지르기는 소위 '미친 짓'의 연속일 따름이다. 마치 내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오늘만을 위해 살겠다는 듯, 당장 코앞에 닥친 욕망 앞에서 다들 아등바등 대느라 정신이 없다. 책을 읽다보면 이런 한심하고 궁상맞은 인간들이 또 있을까 싶어 혀를 끌끌거리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정말 묘하다. 첫 대면의 당혹스러움을 조금 지나고 나면 어느 새 이 책 속에 깊이 빨려든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물론이고, 그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가장 '문제적 인물'인 딘 모리아티의 대책 없는 삶이 어느 순간 내게는 힐링으로 다가온다. 언제부턴가 내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청춘'이라는 이름의 핵폭탄이 내 심장의 중간에 쿵 하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나이가 젊어서 청춘도 아니고, 아프니까 청춘도 아닌, 어떤 권위와 제도로부터 순수하게 해방된 그냥 그대로의 '자유의지'로서의 청춘!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길 위에 있었다.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잭 케루악, 이만식 옮김, <길 위에서> 2권, 58쪽-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 밤, 우리의 기다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오길 고대하던 여자 셋 모두 어느 순간 하나 둘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우리를 피해 뒷문으로 슬슬 빠져나간 듯 했다. 이미 빗물에 흠뻑 젖어있던 우리는, 그러나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가까운 술집으로 들어가 또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그 때 우리가 취해있었던 건 술이 아니라 청춘이었을까.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시 길 위에 설 수 있을까…? 이 물음을 껴안고, 우선,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다시 펼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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