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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 | 연재 [수요포럼]
‘자생적 출판인’ 책읽기를 말하다
정리 도휘정(2017-08-28 14:38:43)



서른네 살, 그는 '서해문집'이라는 출판사 이름을 지었다.
서해는 군산 출신인 서해문집 김흥식 대표(60)의 고향 앞바다. 초창기 "전라도 애들하고는 장사하면 안 돼"란 말에 주눅이 들어 "책의 바다"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25년 넘게 책을 쓰고, 책을 묶고, 책을 내는 동안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서해 바다가 일렁였다.
그 일렁거림으로 그는 서해문집의 대표시리즈인 '오래된 책방'을 기획하고, 베스트셀러인 『징비록』을 직접 번역해 출간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는  『산책』이라는 '혼자 쓰고 만드는 약간 두꺼운 전단지'인 칼럼집을 10번 냈다.  『산책』은 "대한민국에서 책을 내면서 산다는 게 무엇인가 많이 고민하고 싸우다가 지쳐서 혼자 쓰기 시작한 것"이다.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글전쟁』, 『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전봉준 재판정 참관기』 같은 책을 직접 쓰고, 엮고, 냈다. 팔릴 수 있는 책보다는 내고 싶은 책을 내고자 했던 그의 욕심은 자연스럽게 역사와 고전에 대한 탐구로 계속되고 있다.
그의 가슴 속 서해 바다는 한 번도 잔잔했던 적이 없다. 서해 바다가 전부 기쁨만은 아니었으나, 그 일렁거림이 있었기에 그는 일생을 책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책에 목숨을 걸다

80년대 중후반.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운동을 해서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시작한 것이 출판사였다. 먹고 살기 위해, 아니면 운동의 일환으로 출판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수요포럼'을 찾은 김흥식 대표는 스스로를 "자생적 출판인"이라고 말했다. 서강대학교 3학년 때, 그는 일생을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양의 대학은 도서관을 지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은 대부분 도서관이 한 쪽 구석에 치우쳐 있어요. 도서관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본산인데, 우리는 도서관 보다는 교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죠. 다행히 모교는 도서관이 중앙에 있었어요. 그 곳에 약 50만 권의 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읽은 건 0.01% 정도 될까. 대신 구경은 다 했어요. 000 총류부터 999까지 다 봤습니다. 책을 보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스물세 살, 그는 "이웃들 모두에게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 확실한, 책을 보급하는 일에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대학을 다니기 힘들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다. 
"저의 집은 돈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이른바 '빨갱이'이시라 돈을 벌 수가 없었죠. 출판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직장에 들어갔죠. 은행이었는데, 다들 너는 은행장을 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잘나갔습니다. 제가 백과사전을 다 읽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0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어요. 그런데 (백과사전을 읽어봐도) 두 번 산 사람은 없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은행장을 할 것이냐,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출판을 할 것이냐…. 두 번은 못 사니까…. 책에 목숨을 걸만 하다 생각한 거죠."
출판일을 한 지 25년. 한 15년은 죽기 살기로 고생했다. 동창들이 한창 잘 나갈 때 그는 분유값이 없어 고생했다.
"제가 책에 목숨을 건 이유는 결국 오늘의 모든 삶을 구현한 것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없으면 축적이 안 되죠. 만약 전 시대가 습득한 지혜나 지식, 지성이 없었다면 컵 하나를 만들더라도 맨 땅에서 시작했어야 합니다. 다행히 과거에 만든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줬고, 그걸 바탕으로 우리에겐 새로운 컵을 만들 능력이 생긴 겁니다. 오늘의 우리도 미래를 위해 글로 전달해야 합니다. 물론 영상이나 그림도 있지만, 세상 모든 것은 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이나 그림은 상징성은 강하나 논리를 갖추기는 어려워요. 글은 그 자체가 짧든 길든 논리를 갖추고 있어요. 영상을 통해 어떤 이미지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걸 어떻게 창의적으로 활용할 지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책이 경쟁력

"출판사들이 많이 받는 공문 중 하나가 도서관을 지었으니 책을 기증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화했지요. 관용차 10대 구입하면 정유회사에 전화해서 기름 달라고 하느냐, 복사기 10대 구입했으니 제지회사에 종이 달라고 하느냐, 왜 책만 공짜로 달라고 하느냐…. 책을 모아놓고 건설업자한테 책을 지어달라고 해야지, 왜 거꾸로 됐냐, 항의했죠."
도서관을 짓는 것은 업적이 되지만, 도서관의 책을 늘리는 일은 업적이 되지 않는 사회. 우리는 깡통만 있는 것이다. 그는 "정치인, 행정가들은 깡통을 자꾸 알리지만, 도서관이 필요한 것은 책을 수서(蒐書)하니까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요즘은 도서관에 책이 가득차면 도서관을 확장하기 보다는 전자책을 구입하죠. 하드에 전자책 1,000권 가지고 있으면 볼 거라고 생각하나요? 모든 물건은 꽂혀 있어야 보는 겁니다. 우리가 멋진 연예인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결혼을 꿈꾸진 않죠? 내 손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손에 잡히는 게 있어야 이것이 나와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된다"며 "특히나 책은 내 손에 걸려야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중국, 일본. 제가 미래에 우리가 꼴찌를 할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일본 도쿄의 7층짜리 키노쿠니아 서점, 중국 베이징의 큰 규모의 서점인 시안북센터, 우리나라의 광화문 교보문고를 다 뒤졌는데, 차이가 있어요. 우리나라 서점에 가면 책 넣으라고 목욕바구니만한 바구니를 주는데, 일본 서점에 가면 입구에 고깃집 갈 때 들고 갈만한 바구니가 쌓여 있어요. 그런데 중국 서점에 가면 마트에서 밀고 다닐 만한 크기의 바구니를 줘요. 중국은 그 정도로 책을 삽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 애들에게 우리가 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세계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번역 수준이 높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요새도 그리스 로마시대 고전들이 초역되어 매년 출간됩니다. 근대 초기까지는 거의 모든 서양의 저작물이 라틴어로 쓰여 졌는데, 우리나라는 라틴어를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100명 정도나 될까? 나머지는 신학대에서 성서 때문에 번역합니다. 우리는 라틴어는 불구하고 불문과, 독문과도 거의 사라졌죠? 반성 많이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문화와 지식, 정보를 가진 나라가 이기는 사회지 무력이 강한 나라가 이기는 사회가 아닙니다."
문명은 결국 공부의 산물. 그는 공부는 결국 책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백과사전, 도전은 계속된다
백과사전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집합체. 그가 백과사전을 모으는 이유다. 처음에는 인류 존재가 원숭이 수준에서 고등한 동물로 성장했을까 궁금했다. 이 책 저 책 읽으며 모자이크를 맞출 수도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니 집합체인 백과사전을 다 읽자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는 백과사전이 없다. 그런데도 종이 백과사전이 출간되지 않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우리나라도 동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있긴 하죠. 거기 보면 제임스 테일러라는 영국 초창기 활동했던 크리켓 선수가 12cm 길이 분량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허균을 찾아보니 10cm밖에 안돼요. 이게 영국 백과사전이지 우리나라 백과사전은 아니죠. 외국의 럭비 선수들이 한국 선비들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백과사전은 그 나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사상이 다 들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그 나라 시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아니면 우리의 백과사전이 아니죠. 그냥 객관적인 지식의 취합, 결합체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데, 지식은 객관화가 아니라 전부 주관이에요. 백과사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항목도 우리에 관한 것이어야죠.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항목을 기록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록하지 않아요."
인터넷 시대. 그러나 그는 특히 종이 백과사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종이 백과사전이 필요한 이유는 인터넷 사전에서는 모르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제목을 알거나, 사람의 이름을 알거나, 뭐라도 알아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이 백과사전은 그냥 넘기면 알 수 있다. 그것은 아주 본질적인 차이다. 제대로 된 백과사전을 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대표의 꿈은 백과사전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가치도 떨어지는 세상에서 그는 왜 백과사전 박물관을 꿈꾸는 것일까?
"제가 가지고 있는 백과사전 중 가장 오래된 게 300년 된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나온 노엘 쇼멜이라는 근대 백과사전의 아버지가 만든 초판본입니다. 300년 된 네덜란드 백과사전이 동양에 있는 제 손에 들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보급이 돼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건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해 놓고서도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역사적·시대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을 찍었다? 하지만 우리 역사 발전이나 우리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금속활자가 의미가 있으려면 극히 제한적인 계층이 독점하고 있던 지식과 정보를 많은 사람에게 보급해서 시민의 시대가 오거나, 권력이 분산되거나, 권력지형이 바뀌었거나 할 때 의미가 있는 거죠. 반면에 장사치에 불과했던 구텐베르크가 인쇄해서 보급한 성서는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근대 시민국가의 기초가 됐죠."
프랑스의 대혁명 역시 디드로의 백과사전이 도화선이 됐다. 디드로가 백과사전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새로운 정보와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적 시각을 전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기초가 형성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서도 사회 발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 역시 발명이 아니라 발명이 지향해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공부는 절대 점수 따는 게 아니에요. 21세기 중반으로 가면 점수 따는 인간은 AI한테 다 지게 돼있습니다. 이제는 공부하는 인간, 창조의 원천이 되는 논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지식, 지성, 역사의 논리를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AI에 지배당하게 될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창조하는 일인데, 그러려면 남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 지혜, 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융합의 시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녹여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시대. 창조적 지식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책 말고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아무리 해도 책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책에 인생을 걸만합니다."

강연의 시작과 끝은 책은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2년 전부터 서해문집이 책 내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책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라서 사장이 관여하다 보면 직원들이 창조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대신 내고 싶은 책만 내고 싶어서 '도서출판 그림씨'를 새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전두환 타서전』을 냈다.
『전두환 타서전』은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도 나오며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책은 왜 안팔리냐"며,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팔려고 만든 책은 아니었을 터. 그의 가슴 속 서해 바다가 또 한 번 그를 이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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