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7.8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억압받는 민중의 연대를 향한 투박하고 우직한 재현
올 리브 올리브
김경태(2017-08-28 14:52:42)



공동 연출을 맡은 김태일과 주로미 부부는 자신들의 두 아이를 데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촌 안으로 들어간다. 그 난민들은 수십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억울하게 쫓겨났다. 심지어 자신들의 소유지인 올리브 밭에 수확을 하러 갈 때조차,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비록 가난할지언정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스라엘로부터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는 민중 봉기를 통해 가족과 친구를 잃거나 감옥에 보낸 사람들이 태반이다. 감독은 점점 좁아져가는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군인들 앞에서 벌이는 시위에 따라 나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사 차량을 향해 익숙한 돌팔매질을 하자, 군인들은 최류탄을 쏜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그들을 따라 카메라도 쉴 새 없이 흔들린다.

이 영화에서 통역을 제외한 현장 스태프는 그 4명의 식구가 전부이다. 부부가 연출과 촬영을 맡고 아직 청소년인 남매가 그들을 보조했다. 아무래도 그러한 조건 때문인지, 영상은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다. 때때로 카메라는 거칠게 흔들리며 서툴게 인물과 풍경을 담아낸다. 그만큼 영화의 형식적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대변한다. 미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상들은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을 분리한다. 감독은 이를 피하기 위해, 매체를 다루는 세련된 테크닉을 지닌 영화인이기에 앞서 하나의 가족으로서 그들 앞에 선다. 그들에게도 그곳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디게 해주는 소중한 가족이 있다. 영화는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는 방식으로 재현 주체와 대상 간의 위계를 지워낸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마저 그 난민에게 할애하면서 외부인의 관점을 최소화한다. 감독은 최대한 뒤로 물러나며 오롯이 그들만을 위한 영화를 완성한다.

그들은 철저히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시각에서 주변을 응시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가로지르는 장벽을 넘어 가지 않는다. 그들은 난민들의 시선을 통해 멀찍이 있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정착민들을 바라본다. 난민들은 자신들의 사원에 불을 지르고 주거지를 무너트린 이스라엘인들을 원망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국제 뉴스에서 들을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부당한 대응, 즉 과격한 아랍인들이 불특정 다수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폭탄 테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편파적인 재현으로 편파적이었던 역사를 상쇄한다. 그동안 그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지 못했던 그 길었던 과거를 보상한다.

그리고 영화는 우직하게 지금 여기의 삶에 주목한다. 과거 팔레스타인 난민과 이스라엘 군인이 충돌하며 벌어졌던 끔찍한 유혈사태를 담은 자극적인 자료 화면을 사용하지 않는다. 과잉된 분노와 슬픔 속에서 그들이 그저 연민의 대상으로 소비되기를 원하지 않기에 그 모든 수사는 불필요하다. 형식이 내용을 추월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부모가 봉기에 앞장서다 죽은 자식들을 얘기할 때, 우리는 오롯이 그들의 몸짓과 표정에만 집중한다. 감정을 절제한 오래 보여주기 방식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함은 이성을 벼리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도록 돕는다.

투박한 영상은 민중의 진심어린 연대와 공명한다. 감독은 관객들이 그들에게 자선이나 자비를 베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이쪽과 저쪽의 삶을 구분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민중의 삶은 어느 나라나 다르지 않다. 그들의 모습은 자본의 탐욕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은 한국 사회의 철거민들과 겹쳐진다. 연대는 상대방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장난치며 거리를 걸어가는 아이들은 감독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또 몇 살인지를 묻는다. 그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보내는 그 이방인의 연대에 대한 다정한 화답이다. 그 질문들에 대한 감독의 대답은 외화면에서 들려오고, 카메라는 여전히 그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