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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예술적 열망과 일상적 돌봄의 교직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성
<시인의 사랑>
김경태(2017-10-25 17:00:37)



<도희야>(2014), <문영>(2015), <꿈의 제인>(2016)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 영화에서는 성 소수자들이 혈연 가족의 한계나 부재 앞에서 힘겨워하는 청소년들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가족의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들은 무능하거나 폭압적인 가부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차마 그 가족을 박차고 나올 수 없다. 그들에게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일 뿐이다. 이 때, 감독들은 그 청소년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어려운 역할을 다른 누구도 아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에게 맡긴다. 성 소수자들은 '변태'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오랜 편견을 뒤집으며 더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우정의 의미에 대해 논한 마크 버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깊고 고요한 고립을 마주한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우정에 능숙하다. 더 이상 그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되어있기에 과잉될 수밖에 없었던 성적 주체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신 그 능숙한 우정을 통해 혈연 중심의 가족이라는 해묵은 관계의 빗장을 풀어 다양한 관계의 양상들을 생산하는 첨병이 된다.

김양희 감독의 <시인의 사랑>(2017)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못생기고 뚱뚱하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시인(양익준)'에게는 생활력 강한 '아내(전혜진)'가 있다. 어느 날 그는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년(정가람)'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시인은 소년의 열악한 가정환경과 마주한다. 소년은 10년 넘게 전신이 마비된 채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는 그에게 무심하다. 시인은 소년의 삶으로 들어가 그의 가난과 오랜 상처를 돌본다. 동성 성애는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소년에 대한 세심한 돌봄의 행위로 대체된다.

그러나 그것은 연민이 아니다. 아니, 연민이어서는 안 된다. 연민만으로는 새로운 관계로 도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년은 반복해서 묻는다. 내가 불쌍해서 그러냐고. 아마도 그동안 그에게 있어 낯선 어른의 무조건적 친절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정동은 그 짧은 연민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불쌍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더 힘이 세다. 시인은 소년과의 속 깊은 소통을 통해 시적 영감을 받는다.

시인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친구와 아내에게 건네는 커밍아웃의 순간마저, 별 긴장감 없이 일상적 농담 속에 섞여 들어간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 금기시되는 사랑의 무게를 덜어내고 구질구질한 현실의 옷을 입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친 성격에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소년은 시인에게 대놓고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그 짝사랑은 황홀하게 아름답지도, 치명적으로 위험하지도 않은 채 맨바닥을 뒹군다. 동성애를 현실 도피의 작인으로 이용하지도, 미학적으로 박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닮아 있다. 시인의 시는, 설령 동성애일지라도 그렇게 사람 냄새 나는 팍팍한 사랑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예술적 열망의 자리가 일상적 돌봄의 자리와 촘촘히 교직한다.

소년의 아버지가 죽자, 시인은 소년에게 같이 떠나자고 한다. 시인은 소년에게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소년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단 한명의 가족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안 소년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몰래 서럽게 운다. 결국 시인은 아내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다가 몇 년 후에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시인은 3,000만원이 든 카드를 선뜻 그에게 건넨다. 소년에게서 영감을 받아서 낸 시들로 번 돈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소년이 그에게 같이 떠나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 갓 돌 지난 자식이 있는 그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무엇보다 그 소년은 더 이상 돌봄이 필요 없는 성인이 되었다. 이제는 소년이 그 사랑을, 그 우정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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