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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로마, 누구냐 넌!
로마인 이야기 VS 마스터스 오브 로마
이휘현(2017-10-25 17:03:54)



5년 전쯤 직장 선배 소개로 전주의 한 독서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항상 일에 치인다는 명목으로 게으름이 더해가던 나의 책읽기에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겠다 싶어 선배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이 지역에서는 제법 권위를 인정받는 독서클럽 중 하나에 든다고 하니 내심 기대도 컸다.
모임은 2주에 한 번씩 이른 아침에 진행되었다. 고전소설부터 인문학서적까지 다양한 책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딱히 사교생활이라고 할 게 없던 내 건조한 일상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건 자그마한 기쁨이었다.
한 달 간 멕시코에 연수 다녀온 시간을 빼면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제법 성실히 모임에 참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좋은 관계가 오늘까지 계속되었다면 좋았으련만, 나의 독서모임생활은 1년 여 만에 끝장나고 말았다.
화근의 발단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였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클럽의 리더가 일 년 짜리 대형 프로젝트로 로마 역사를 한 번 깊이 공부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구성원들에게 한 것이다.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유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로마 문명을, 아울러 현실적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 시대 문명의 상당 부분이 유럽의 그것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결국 우리 삶의 또 하나 기원을 찾아간다는 측면에서 로마사 공부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총 15권. 한 해 3분 2를 투자하는 거대한 독서 프로젝트. 당시만 해도 예상 가능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내 개인적인 의미로는 지난 1990년대 중후반부터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던 <로마인 이야기> 독파가 드디어 실현 되겠구나, 라는 안도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새해 첫 모임을 위한 의욕적인 독서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요일 하루를 날 잡아 순식간에 한 권을 끝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어떤 찜찜함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미리 사두었던 <로마인 이야기> 제2권을 꺼내들었다. 중간 부분까지 읽고 나자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찜찜함은 점점 선명한 판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 책이 교양인을 위한 필독서라고?
다시 제1권을 펴들었다. 이번엔 빨간펜을 오른손에 쥔 채였다. 수많은 페이지에 빨간줄이 그어졌다. 그 순간 내 마음에는 황당함을 넘어 일말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내가 이런 수준의 책을 지난 20년 동안 대단한 인문서적으로 알고 마음의 빚까지 지며 살아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간 우리나라 수많은 언론이 <로마인 이야기>를 필독서로 취급해 온 것을, 이 책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를 마치 우리 시대의 현자인 양 대접해 온 사실을 개탄했다.
로마에 대한 일방적인 헌사와 非로마국들에 대한 끊임없는 무시. 문명의 지구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을 헐겁게 이어붙인 로마 연대기. 우측으로 한참이나 기울어 있는 자신의 극우 정치관을 로마의 역사 서술에 거침없이 적용하는 무모함.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승자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안에 음험하게 웅크리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강렬한 향수.
이건 혹 나만의 판단 착오일까? 부족한 소양 탓에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조바심이 일자 컴퓨터 검색창에 곧바로 '로마인 이야기'를 타이핑해 보았다. 그리고 안심했다. 이미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이 출간되었던 시점부터 이 책의 오류와 위험성을 지적하는 여러 학자의 글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거대출판사의 마케팅 홍수 앞에서 지난 십 수 년 간 끊임없이 쓸려나갔다. 그 덕(?)에 <로마인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람들과 독서모임에서 당당히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독서모임의 리더에게 <로마인 이야기> 읽기로 상당기간을 할애하는 건 시간과 돈 낭비일 뿐 아니라 잘못된 가치관에 호도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절독을 요구했다.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리더의 계획은 완고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자연스레 독서모임에서 튕겨져 나왔다. 몇 년이 흘러 함께 모임에 참석했던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 독서모임에서는 결국 <로마인 이야기> 전권 독파를 예정대로 잘 마무리 했다고 한다. 대단한 뚝심에는 박수를, 무모한 몰지성에는 탄식을….
한 달 전 쯤 건지숲속 작은 도서관을 가족과 함께 찾았다가 흥미로운 책을 하나 발견했다. <로마의 일인자>. 우리에게는 1980년대 추억의 미국드라마 <가시나무새>의 원작자인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중 첫째 권에 해당하는 소설이었다. 총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만 해도 세 권짜리 번역본으로 몇 해 전 한국의 서점가에 깔렸으니 그 방대한 분량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은 호기심이 일어 들추기 시작한 소설은 이내 콜린 매컬로가 전하는 로마의 세계로 나를 빠져들게 했다. 로마 시대의 한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삶으로 달려가는 이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속에는 당시 로마의 사회상과 생활상, 정치와 경제, 심지어 로마라는 국가의 공간배치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작가가 발품을 팔아 20년 공들여 완성한 느낌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외피는 소설인데 알고 보면 웬만한 로마사 전공 서적보다 더 꼼꼼하게 서술된 일종의 역사책이라 할만 했다. 역사평설이라는 애매모호한 정체로 수준 이하의 논리가 흩뿌려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극과 극 체험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이 또한 나만의 착각일까?
지난 2015년에 작고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아직 한국 서점의 시중에 완역되어 나오진 않았다. 언젠가 완역본이 나온다면 그 분량으로만 따져도 <로마인 이야기>를 앞지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가 <로마인 이야기>를 압도하는 건 저자와 책이 보듬고 있는 수준과 품격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위안부 망언 등으로 위세가 좀 꺾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서점에 가보면 대한민국에서의 시오노 나나미 인기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풍경을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독서의 선택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남들보다는 좀 더 부지런히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리더라면, 적어도 <로마인 이야기>와 <마스터스 오브 로마>의 차이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지성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그 때의 앙금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나 보다.
여하튼, 늦었지만 독서모임의 성실한 구성원들에게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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