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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귀여운 물신주의 세계, 현실의 옷을 입다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김경태(2018-02-07 17:21:57)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카모메 식당>(2006)과 <안경>(2007) 등을 통해,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일상을 조망한 ‘슬로우 라이프 무비’라는 장르를 개척해 숨 가쁜 일상에 지친 일부 관객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관객들은 매혹적인 환상이 아니라 단조로운 일상을 마주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그 영화 속에는 우리가 갈망하는 가장 이상적인 일상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영화들에서 일상의 불협화음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을 통해 해결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 구운 시나몬롤 하나와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에 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은 맛있는 만두를 함께 먹으면서 해소된다. 혹은 도도한 고양이 한 마리가 잘 풀리지 않는 문제의 해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귀여운 물신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완전무결한 세상이다. 어쩌면 그동안 감독이 영화 속에서 다뤄 온 소재들이 그만큼 사소했기 때문에 가능한 가벼운 해결책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가 트랜스젠더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민감한 성 소수자 문제를 전면화 했을 때, 그녀의 평온한 일상은 팍팍한 현실 속으로 한 뼘 더 들어간다.

12살 소녀 ‘토모’는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딸을 내팽개친 채 몇날 며칠 집을 비우기 일쑤일 만큼 철이 없다. 그때마다 토모를 돌봐주는 이는 외삼촌 ‘마키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키오와 동거 중인 ‘린코’라는 트랜스젠더 여성이 반겨준다. 경계하던 토모는 그녀가 정성들여 준비한 도시락을 계기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토모는 린코 곁에 누워 그녀의 조금 단단한 ‘인공 가슴’을 주무른다. 린코는 자신의 가슴을 기꺼이 내어주며 토모의 정서적 결핍을 채워준다.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된다. 과거 여자가 되고 싶었던 어린 린코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가슴은 이제 한 아이에게 엄마의 따뜻한 품을 대리한다. 이 영화에서 감독의 귀여운 물신주의적 욕망은 ‘여자의 가슴’으로 향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것이 ‘진짜’일 필요는 없다고 관대하게 말한다.

린코는 새로 생긴 가슴에 대한 애착만큼 잘려 나간 페니스에 대한 애도도 잊지 않는다. 그녀는 뜨개질로 가짜 페니스를 만들면서 원치 않았던 페니스에 대한 애증과 수술 후에도 도사리는 편견어린 시선에 대한 울분을 새겨 넣는다. 뒤이어 토모와 마키오가 동참하며 108개의 가짜 페니스를 완성한다. 이는 곧 108 번뇌를 상징한다. 이처럼 린코는 혐오하는 이들과 맞서 싸우거나 그들을 계몽시키려는 노력 대신에 물신주의적 뜨개질에 침잠한다. 그것은 자신의 진심을 물화하는 행위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그녀/감독이 택한 윤리적 방식이다. 그들은 해안가에 모여 그 페니스들을 태우는 의식을 치른다. 물론 앞선 영화들에서와 달리, 그 후에도 오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며 트랜스젠더를 향한 뿌리 깊은 편견 또한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 곁에는 그녀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다.

린코는 성 소수자로서 자라왔기에 누구보다 타인의 외로움에 민감하다. 토모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녀의 말대로, 아이를 돌보는 것은 엄마나 여자의 몫이 아닌 인간의 의무이다. 부모나 가족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보다 서로에 대한 돌봄의 행위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것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는 가슴이 무조건적인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가슴을 가슴답게 하는 것은 그것이 본래의 쓰임에 충실할 때이다. 그녀는 다시 엄마에게로 돌아간 토모에게 뜨개질로 만든 가슴 한 쌍을 선물한다. 그 가슴 안에는 그녀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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