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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재난의 트라우마를 상상적으로 극복하기
너의 이름은
김경태(2018-08-30 11:17:10)



올여름, 일본의 서남부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로 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원전 사고의 악몽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재난 후에는 언제나처럼 후회와 반성, 절망과 자책이 교차한다.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을 사전에 철저히 했는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최선을 다했는가. 반복되는 재난의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는 있는 것일까. 2016년에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판타지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그 일본의 오랜 트라우마와 공명하며 일본에서만 1,50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시골 여고생 '미츠하'는 외할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신사를 지키며 마지못해 무녀의 역할을 맡는다. 전통을 중시하는 외할머니는 정치에 나서기 위해 신사를 버린 미츠하의 아버지를 원망한다. 미츠하는 어머니가 그러했듯 외할머니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지만, 또래의 여학생처럼 도쿄 같은 대도시를 동경한다.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도쿄의 남고생 '타키'와 몸이 바뀌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지진이나 폭우보다 황홀한 '혜성의 낙하'라는 재난이 등장한다. 엄밀히 말해, 이 영화의 환상성은 미츠하의 특별한 능력에 앞서 그 혜성의 낙하라는 시각적인 매혹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특히나, 신카이 마코토만의 집요한 시각화 덕에 그 환상성은 극대화될 수 있었다. 


지표면 위에서 분화된 혜성은 축제가 한창인 마을 위로 떨어지지만, 이장인 아버지는 주민들을 지켜내지 못한다. 이는 재난에 속수무책인 현실 정치를 반영한다. 영화에서처럼 일본 정부는 국민을 지켜주지 못했다. 혜성이 떨어지는 참혹한 순간을 수려한 영상미로 담아낸다. 가상의 카메라는 미츠하의 주변을 역동적으로 돌며 다양한 앵글과 쇼트 크기로 혜성이 분화하며 떨어지는 순간을 탐미적으로 담아낸다. 혜성이 비치는 눈동자를 클로즈업하며 매혹되어 꿈쩍하지 못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그러나 혜성이 지상에 닿는 찰나에 화면은 한동안 암전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는, 혹은 영화는 눈을 감아버린다. 재난의 순간, 그 중핵인 죽음은 검게 가려지고 한 없이 결핍된다. 그녀를 비롯한 주민들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으면서 재난의 비극성은 퇴색된다.


이것은 반대 의미에서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의 <카포>(1960)에 등장하는 유명한 트래킹 쇼트 를 연상시킨다. 나치 수용소에 갇힌 여인이 일부러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카메라는 로우 앵글로 트랙인 하며 그 죽은 여인의 얼굴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후에 이 장면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러한 촬영 방식을 택한 감독의 비윤리적인 태도는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죽음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는 외설적/포르노적 재현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짜 죽음은 결핍과 과잉 그 사이 어딘가에 있어야만 한다. 


미츠하는 타키의 도움으로 혜성이 떨어지기 직전으로 돌아가 주민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아버지의 방해가 만만치 않다. 낙하하는 혜성은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여전히 아름답다. 대피의 성공 여부를 알려주지 않은 채, 마침내 지구와 출동해버린 혜성은 굉음을 내며 마을 곳곳을 파괴한다. 앞서 생략했던 재난의 이미지이다. 단, 그 어디에도 인명 피해는 없다(고 뒤늦게 알려준다). 쇼트의 생략과 감각의 재배치를 통해 우리는 직접적인 죽음을 목격하지 않고서 재난을 (재)경험한다. 이로써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재난의 공포와 상처를 상상적으로 극복해낸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하고 정치가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할 때, 영화가 발 벗고 나서서 인간을 위로한다. 재난을 화려하게 덧칠하며 현실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일시적으로 무디게 한다. 죽음을 현실의 뒤편으로 애써 밀어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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