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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리틀 포레스트'는 없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휘현(2018-09-17 11:02:26)



시골의 풍경이 바뀌어 간다.
10여 년 전 고향땅에 발령받아 촬영이랍시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면서 내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농촌의 풍경은 사실 '폐허'에 가까웠다. 6.70대 이상의 노인들만 뎅그러니 남은 시골은 10년 안에 황무지가 되겠구나, 라는 게 30대 직장인이었던 나의 비관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농촌의 풍경이 바뀌어 간다. 황무지로만 남을 것 같던 시골 구석구석에 깔끔하고 예쁘게 디자인 된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집이 들어온다는 것은, 사람도 들어온다는 것일 터. 시골을 떠났던 누군가들이, 혹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시골의 삶을 동경하며 새로운 삶을 선택한 누군가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 드라마틱한 변화에 내 맘도 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생이모작은 내 유년의 기억을 지배하는 그 공간 속에서 멋지고 낭만적으로 펼쳐지리라. 아담하고 예쁜 집에 텃밭을 가꾸고 반려동물들과 함께 하며, 항상 맑은 공기와 풍경 속에서 오랜 시간 지쳐있던 내 마음을 정화시키고, 또 주말이면 도시의 친구들이 찾아와 밤에 흥겹게 파티를 벌이는……. 성과 속의 적절한 조화.
허나 이 신나는 공상이 명백한 환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데에는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내가 그리도 복귀하고 싶어하는 고향땅 시골은, 내 삶의 안식처도 망명처도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냥 또 하나의 현실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일고의 낭만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책.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가 바로 그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현존하는 일본문학의 거장이다. 나는 문청입네 하며 20대 시절 그의 소설 몇 권을 건드렸다가 내상만 입은 기억이 있다. 그의 소설 작품들은 나와 쉽사리 통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은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 등으로 적당히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그의 문학세계에 관한 트라우마에 시달려 오다가, 나는 얼마 전 우연찮게도 서점에서 그의 산문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명처럼 책을 펴들었고, 10분도 되지 않아 나는 곧바로 책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통했다!


여행자가 아닌 도시에서 이주한 당신은 더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좋든 싫든, 때로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자연의 위협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전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지 주민들은 그런 자연의 속성을 몸으로 알아 자연에 아름다움을 느끼기 전에 먼저 경외심을 품습니다. 자연을 놀이터가 아닌 생활의 장으로 깊이 인식합니다. 결코 당신처럼 허울뿐인 감동에 젖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는 않습니다.  (30쪽)


젊은 시절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20대 중반의 꽤 이른 나이에 귀향을 선택한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 나가노 현 아즈미노라는 곳에서 시골생활을 하며 소설을 써오고 있다. 그 세월이 50년이다. 이쯤 되면 귀농귀촌인의 거의 '시조새'라 불려도 무방하리라. 그런 그가 시골에서의 안락한 삶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무시한 경고를 보내는 이유는 뭘까.
단순하다. 막연한 청사진에 기대어 섣불리 귀농귀촌을 결심했다가 삶을 송두리째 거덜 낸 일본의 도시인들을 자신의 눈으로 무수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일본에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2008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본의 경제번영을 이끌었던 단카이 세대(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7-1949년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부머)가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한 시기가 2008년 즈음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도시인으로서의 삶이 녹록치 않음은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피로사회를 수십 년 간 버텨온 일본의 베이비부머들이 귀촌 열풍에 기대어 자신의 나머지 삶과 재산을 의탁했지만, 시골에서 펼쳐진 풍경은 그들이 꿈꾸었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추상과 관념의 작품세계로 독자를 골탕 먹이던 마루야마 겐지가 두 손 걷어붙인 채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뭣 모르고 시골에 왔다간 골로 간다!!"는 서슬 퍼런 메시지를 날리는 데에는 일고의 문학적 고민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좀 다른가? 천만의 말씀!!
요즘 평행이론이라는 말이 이 곳 저 곳에서 남발되고 있는데, 마루야마 겐지가 10년 전 일본사회에 던진 경고가 2018년 현재 우리에게 소름끼칠 만큼 완벽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십년 전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정년을 맞이한 한국의 베이비부머들이 낭만적인 시선을 시골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상품이 된다. 스타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는 나영석 피디가 최근 몇 년 사이 <삼시 세끼> 시리즈와 <숲 속 작은 집>으로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슬로 라이프를 시전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그것은 완벽한 판타지다.
공지영은 <지리산 행복학교>로 자연 속에서의 삶과 인간을 찬양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도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현명함을 발휘한다. 지리산에 왕래할 수 있는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있고 또 자신을 반겨줄 인적 자산이 있으니 잠시 쉬었다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책도 쓰고 돈도 번다. 탐하고 싶은 능력이다. 하지만 그녀가 좀 더 현명했다면 <지리산 행복학교> 같은 삼류 에세이는 쓰지 말았어야 한다. 그건 위선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과 낭만을 꿈꾸었다. 하지만 좀 냉정해지자.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누구나 김태리가 될 수는 없다. 시골에 간다고 반겨줄 류준열도 진기주도 없다. 그냥 혹독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전언을 가슴에 새겨보자.


지쳐 있을 때 결단하지 마라 / 시골에 간다고 건강해지는 건 아니다 / 텃밭 가꾸기도 벅차다 /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 온다 /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 엎질러진 시골 생활은 되돌릴 수 없다


현실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 어떤 낭만의 혐의 없이 냉혹하게 드러내 보이는 진실의 힘. 마루야마 겐지가 괜히 거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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