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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겨울을 휩쓸었던 촛불혁명에서 그를 만나다
이광재 『봉준이, 온다』
이휘현(2018-10-31 12:40:49)



2013년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한 달 간, 나는 네 명의 일행과 함께 멕시코를 다녀왔다. 멕시코 중부의 유서 깊은 도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에서 멕시코 북단의 후아레스까지,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닷새 정도 머무르며 총 9개 도시를 가로질렀는데 나름의 '멕시코 대장정'이었던 셈이다. 육로를 따라 진행되는 긴 여정이 고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낯선 땅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과 풍경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마리아치의 흥겨운 음악, 독한 떼낄라와 상큼한 코로나 맥주, 매운 할라뻬뇨와 더 매운 하바네라, 타코와 부리또, 끝없이 펼쳐져 있던 사막과 그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직선 도로, 모래 폭풍, 도심 속 어디선가 지독한 가난을 품은 채 유영하던 인디언의 후예들…. 수많은 기억들이 5년이 넘은 지금도 내 가슴 속 어딘가에 '멕시코'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오롯이 새겨있다. 허나 그 기억의 저장고에서 내가 결코 빼먹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판초 비야(Pancho Villa)'라는 인물이다.
1878년 6월 멕시코의 가난한 농장노동자 자식으로 태어난 판초 비야는 1894년 자신의 누이를 강간한 농장주인을 살해하고 멕시코 북부의 산속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도로테오 아랑고라는 본명을 버리고 프란시스코 비야로 개명한 것도 이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자들에게서 훔친 재물을 판초 비야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동료들과 지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또 한 번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장기집권 중이던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맞서 프란시스코 I. 마데로가 이끄는 시민군이 무장 봉기한 것이다. 1910년 시작된 이 내전은 1920년에 막을 내릴 때까지 멕시코 전역에서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지식인들은 이를 일컬어 멕시코혁명이라 부른다. 판초 비야는 이 멕시코혁명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로 혁명군을 이끌었다. 멕시코 중북부에서 정부군에 맞서 수차례의 전설적인 승리를 기록했고, 1923년 7월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기 전까지 '멕시코 민중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았다.
내가 5년 전 한 달 동안 멕시코에 머물며 가장 놀랐던 것은 바로 이 판초 비야에 대한 멕시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죽은 지 1백 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들에게 판초 비야는 민중의 영웅이자 굉장한 자부심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멕시코 체류 당시, 우리 일행이 들르는 도시마다 곳곳에 판초 비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가 대승을 거두었던 전적지는 물론이고, 그가 잠시 머물렀다 간 곳, 심지어 그가 혁명 동지들과 술 한 잔 나누었던 술집들에도 어김없이 판초 비야의 사진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어느 도시이든 하나 이상 운영되는 멕시코혁명 박물관이 있고, 도심 곳곳 기념품 상가에는 판초 비야를 새겨놓은 티셔츠, 열쇠고리, 술잔 등 다양한 기념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단순히 역사책 속에서만 박제되어 있지 않고, 여전히 현대 멕시코의 다양한 공간 속에서 친근한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다는 것! 이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솔직한 감정은 부러움이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본 그 풍경은 '역사(혹은 혁명)의 상품화'라기 보다는 '역사(혹은 혁명)의 일상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8년 지금의 우리는?


지난 해 이광재의 <나라 없는 나라>를 두 번 읽었다. 나는 처음보다 두 번째 독서가 훨씬 좋았다. 행간 속에 숨어있던 작가의 다양한 의도를 좀 더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었달까.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그간 내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뼈아프게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 소설이 좀 더 빠른 전개로, 그러면서도 좀 더 대중적인 문체로 쓰여 지금 보다 훨씬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두 번째 독서 후에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에 출간된 <봉준이, 온다>를 얼마 전 뒤늦게 읽고, 나는 작가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나라 없는 나라>(2015년) 이전에 이미 <봉준이, 온다>를 통해 작가 이광재는 충분히 박진감 넘치고 또 술술 읽히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발품 팔고 공들여 완성한 전봉준 평전이 수 년 동안 버젓이 서점에 깔려 있었는데, 나는 뭣도 모르고 <나라 없는 나라>를 '고구마 서사'라 타박해 대었으니 그런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굳이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이광재의 <봉준이, 온다>는 좋은 책이다. 시대의 부름이나 역사에 관한 소명의식 같은 거창한 구호가 곁들여지지 않아도 좋다.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단어에 약간의 울컥함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펼치시길.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이 고장에서 나고 자라왔거나, 혹은 지금 이 곳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다. 그 곳에 우리의 뿌리가 있고 또 우리의 자존감이 있다. 드러내놓고 동네방네 떠들어도 좋은 뿌듯함이 있고 에너지가 있다. 그래서 이광재의 <봉준이, 온다>는 정말 좋은 책이다.


올해 봄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이 세워져 화제가 되었다. 압송 당해 최후를 맞이한 서울시에서도 전봉준 동상을 세우는 마당에,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또 한시적이나마 일종의 해방구를 조성했던 이 곳 전주에서 그의 동상을 세우지 못할 이유는 무언가.
'전주 한옥마을 연간 천만 관광객'이라는 말이 포스터 표어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요즘 이 곳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 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느끼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큰 한옥마을 사이즈와 '맛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점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유행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가기 마련 아닌가. 지금과 같은 맛집 위주, 길거리 음식 위주의 관광상품으로는 천만 관광객이라는 수식어를 유지하기 힘들다. 전주만의 특별한 콘텐츠가 없으면 안 된다.
나는 그 특별한 콘텐츠가 동학농민혁명이고 또 녹두장군 전봉준이기를 바란다. 젊은이들이 역사에 관심 없는데 무슨 그런 낡은 콘텐츠를 들이대냐고? 천만의 말씀. 한반도 땅 근대의 문을 열어젖힌 동학농민혁명군과 전봉준의 숨결은 저 장구한 역사 속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을 지나 우리의 DNA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 2016년 겨울을 휩쓸었던 촛불혁명이 그 증거가 되어준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녹두장군의 결기서린 표정이 새겨진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활보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나는, 타락한 사람인가? 풍남문 광장 한 가운데 전봉준을 비롯한 여러 동학농민혁명 영웅들의 동상이 세워지고 그 앞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셀카봉을 들이대는 상상을 하는 나는, 신성한 역사를 값싸게 팔아먹으려 하는 장사치인가?
이제 전봉준이 우리에게 좀 더 가까이, 친근하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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