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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인간의 눈높이에서 펼쳐지는 애도의 우주여행
퍼스트맨
김경태(2018-11-16 13:36:16)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우주 영화가 도래했다. 앞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2013)가 우주에서 조난당한 주인공의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치열한 사투를 다뤘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2014)에서 주인공은 황폐한 지구를 대신할 행성을 찾아 광활한 우주를 떠돈다. 이들 영화에서 우주는 매혹의 대상으로, 카메라는 그 미지의 광활한 공간을 탐미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자유롭게 유영한다. 그런데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퍼스트맨>(2018)은 조금 다르다. 카메라의 시선은 우주보다 인간을 향하며, 그 우주는 인간의 눈높이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또한 서사적으로 봤을 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이야기로 뜻밖의 결말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관객을 이끄는 동력은 무엇일까?

영화는 항공사에서 테스트 파일럿으로 근무하는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이 흔들리는 비행기를 애써 제어하며 착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어지럽게 흔들리는 그의 얼굴과 계기판,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기체의 후미를 번갈아 집요하게 보여주며 그와의 동일시를 요구한다. 마치 관객으로 하여금 멀찍이에서 관망하지 말고 그의 힘든 여정에 동참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즉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한 고증을 넘어 체험의 층위로 관객을 끌어올리고자 한다. 곧이어 어린 딸 '캐런'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퍼하는 닐을 보여준다. 딸에 대한 애도는 그에게 우주 비행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기 부여를 하며 아울러 관객의 정서적 정박지가 되어 준다.

우주 비행사로 뽑힌 닐은 딸을 떠올리며 고되고 위험한 훈련을 참아낸다. 때로는 그 상실의 아픔이 동료 비행사들의 연이은 죽음과 공명하며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자신과의 싸움은 뜻하지 않은 외부의 적을 만나기도 한다. 달 탐사를 반대하는 여론이 그것이다. TV 시사 프로그램에 나온 어떤 패널은 나사에 투자하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뉴욕의 환경 개선에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위 현장의 어느 가수는 빈민가의 흑인들은 가난에 시달리는데 부유한 백인들은 달에 간다고 비꼬는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영화는 나사에 대한 가치평가를 하지 않으며, 다만 그 다양한 목소리들을 배경처럼 들려주며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돌린다. 닐 역시 묵묵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마침내 닐은 버즈와 함께 아폴로 11호를 타고 다시는 지구로 귀환하지 못할 수도 있는 우주여행을 떠난다. 드넓은 우주의 황홀함을 맛보기 위해서는 폐쇄공포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비좁은 우주선 안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카메라는 우주선 내부와 비행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빈번하게 담아내며 그 점을 강조한다. 반복컨대, 영화는 우주에 대한 탐닉을 경계하며 그것을 인간의 시선 하에 금욕적으로 묘사한다.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의 모습은 서사적 설명을 위해 필요할 경우에만 잠시 등장할 뿐이다. 때때로 16mm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화면의 거친 입자로 다큐멘터리의 질감을 부여한다. 나아가 전문 용어들이 오가는, 우주선과 관제탑과의 교신은 서사의 구체성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사건의 사실감을 높여주는 현장 배경음에 가깝다. 아무나 쉽게 향유할 수 없기에 우주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닐과 버즈는 무사히 달에 착륙한다. 카메라는 닐의 시점에서 그가 달 표면에 첫 발자국을 찍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제야 마음속으로 웅크렸던 몸을 쭉 피며 기지개를 켠다. '인간의 작은 발걸음이 인류의 위대한 도약'이 되었던 순간, 닐은 그 위대한 도약을 다시 매우 사적인 고통의 발걸음으로 되돌린다. 그는 딸의 팔찌를 달 위로 던지고 눈물을 떨구면서 지난한 애도를 끝맺으려 한다.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달에 첫발을 내딛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말한다. 우주가 인간적 은유를 획득하는 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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