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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옛날 옛적 전주에서…
장은영, <책 깎는 소년>
이휘현(2018-11-16 13:41:34)



나에게 <책 깎는 소년>이라는 동화책을 소개한 사람은 나의 아내였다. 어느 날, 꽤 늦은 밤까지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에 몰두하고 있던 아내를 향해 내가 책의 정체를 물었더니 이런 답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10년 넘게 살아온 전주가 이 책을 읽으니까 참 매력적으로 느껴지네."


몇 주 동안 나는 특집 프로그램 준비 때문에 몸과 마음의 여유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책이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동했다. 무엇보다도 '책 깎는 소년'이라는 제목이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기대감을 나로 하여금 품게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이 책을 펴들게 되었다.


<책 깎는 소년>은 어찌 보면 매우 전형적인 '성장담'의 서사를 품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착한 아이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소년의 꿈과 희망이 여러 주변인물과의 관계 속에서 또 여러 사건들의 진행을 통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변 등장인물들이 전형적인 캐릭터로 소비된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대상으로 삼았을 주 독자층을 고려한다면 서사의 독창성과 캐릭터의 입체성을 요구하기 전에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창조되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책 깎는 소년>은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들이 아주 매끈하고 튼실하게 담긴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9세기 말, 그러니까 조선시대 후기쯤으로 보인다. 전주 인근의 시골마을에서 살고 있는 10살 소년 봉운이는 술과 노름에 빠져 집안을 내팽개친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환경 속에서 배고픈 삶을 영위해 가지만 선한 마음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용우 아재에게 목판으로 쓰일 아주 튼실한 돌배나무 하나를 소개하다가 전주 '서계 서포'라는 곳과 자그마한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방각본'과 '완판본'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명과 마주하게 되면서 봉운이의 인생은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 방각본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전주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을 그 완판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 부록처럼 실린 설명과 정보를 간단히 조합해 보면 이렇다.
책이 귀했던 시절, 인쇄라는 기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책이 도달되기를 대중들이 고대하던 그 시절에 방각본이라는 목판 인쇄술이 큰 활기를 띄었다고 한다. 기존의 활판본은 네모난 조각 위에 새겨두었던 글씨들을 내용에 따라 하나하나 꺼내 조합하여 각 페이지를 인쇄하는 방식이었는데, 특히 내구성이 좋은 금속활자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접할 수 있는 보급용 서적을 제작하기에는 부적합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각본은 목판에 한 페이지의 내용을 그대로 새겨내는 방식을 통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대중들에게 책을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었다. 특히 한글 방각본의 경우 대부분 만들어내는 책들이 한글 소설책이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큰 줄기를 형성한 것이 바로 이 방각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러한 방각본이 많이 제작되었던 곳이 서울과 대구 그리고 전주였는데, 이 중 전주의 방각본을 일컬어 '완판본'이라고 한다. 그렇게 전주에서 제작된 완판본 중 춘향전의 한글소설인 <열녀춘향수절가>가 전국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방각본을 목판에 새기는 사람을 일컬어 '각수'라고 하였는데, 장은영 작가는 이 각수라는 오래 전 직업에 '성장 서사'의 숨결을 불어넣어 하나의 멋진 동화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각설하고, 다시 책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의 주인공 봉운이는 서계 서포의 각수 어른으로부터 책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된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각수 일을 배우고 싶어 하는 또래 장호와는 달리 책 만드는 일 자체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봉운이가 각수 어른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수순.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 봉운이가 훌륭한 각수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건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성장 스토리가 아니다. 당연히 '위기'가 닥친다. 독자라면 곧잘 예상하시겠지만, 그 위기의 진원지는 바로 돈을 위해 각수가 되고 싶어 하는 장호. 서계 서포는 문 닫을 운명에 처하고 각수 어른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봉운이의 상심은 깊다. 이 착한 소년은 이대로 주저앉아 예전의 불행했던 처지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인가? 아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우리의 주인공 봉운이는 각수 어른과 함께 멋진 완판본을 하나 만들어 낸다. 그게 바로 <열녀춘향수절가>다. 결말은 모두의 행복. 다만, 위기를 불러온 장호와 그의 형 또출이는 권선징악의 표상이 되어 징벌을 받는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짚어보는 이 동화책의 미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목표로 삼은 꿈을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꿈을 펼쳐나가는 과정이라는 게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열정에 기대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마 내 아내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 집의 두 아이에게 그리고 아내가 독서교실을 통해 교육시키는 아이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책 깎는 소년>을 펴들었을 것이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전주'라는 도시가 품은 맛과 멋, 예술과 인문학의 풍미를 다양한 페이지들 속에서 전달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주인공 봉운이의 발걸음을 따라 전주의 옛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맛있는 국밥이 있고 저잣거리를 들썩이게 하는 판소리가 있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전해지는 여유로운 마음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포 사람들의 작업과정을 통해 엿보이는 책에 대한 열정이 있다.
전형적인 계도를 목적으로 시작한 내 아내의 독서가 도달한 지점이 엉뚱하게도 '전주'라는 공간이 가진 매력을 한껏 만끽하게 해주는 일종의 '풍미'였다는 것은, 작가가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까지의 고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흥미롭게 읽히는 이야기를 단순명쾌하게 직조해내면서도 그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고취시켜주는 것. 작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내었다. 작가의 노고와 성취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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