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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 | 연재 [수요포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집'을 만나다
제191회 수요포럼 | 기억(記憶)/기대(期待)
이동혁(2019-01-15 12:30:02)



매년 여름 '이진아도서관' 열람실 창밖 화단에선 소박한 자태의 둥굴레가 곱디고운 꽃을 피워 낸다. 수줍어 하는 여인네처럼 다소곳이 고개 숙인 꽃망울이 순박한 우리네 정서와 닮았다. 바라볼수록 정감이 가고, 가냘파 보이면서도 우아한 맛이 있어 소담한 도서관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이진아도서관을 설계한 건축가 한형우는 어떻게 도서관 화단에 둥굴레를 심을 생각을 했을까? 그는 화단에 심을 꽃 하나까지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마음과 정성을 담기 위해 오래도록 고민하고 숙고했다. 다년생 꽃일 것, 평상시에 잎이 푸를 것, 그리고 이진아 씨의 기일에 맞추어 꽃을 피울 것. 이진아도서관의 의미를 살리는 데 둥굴레는 최적의 식물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결국 섬세한 배려라는 걸 한 교수에게서 배웠다. 화단의 둥굴레부터 도서관 간판의 글씨 하나까지, 그의 건축에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의 강연을 듣는 동안 차갑고 무미건조하게만 여겨졌던 건축에 따스한 온기가 입혀졌다. 지난 12월 12일 열린 191회 마당 수요포럼에서 한 교수는 따스한 건축과 도서관이 주는 의미를 전했다.



작은 것이 쌓여 의미를 만든다
서대문구 독립공원 뒤편, 차분한 외관을 자랑하는 도서관 하나가 한적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교수가 설계한 이진아도서관이다. 인왕산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너른 창, 차갑고 딱딱한 콘크리트 대신 부드러운 나무의 질감이 느껴지는 외견 등 당장은 그 겉모습에 눈길이 가닿지만, 사실 이진아도서관에는 그 친숙한 모습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사연이 담겨 있다.
유학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진아 씨. 그의 나이 스물셋, 한창 젊음을 꽃피울 때였다. 당시 가족들이 받았을 상심과 슬픔을 가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아버지 이 씨가 미국 출장 중에 딸과 만나 찍은 마지막 사진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진아 씨를 떠나보낸 가족들은 구청에 50억 원이라는 거금을 희사하며 평소 책을 좋아했던 딸을 위해 도서관 건립을 부탁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 저에게 있어서도 이진아도서관은 도전이었어요.”


딸을 잃은 가족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구 서대문 형무소를 마주본 공간의 의미를 하나로 녹여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진아 씨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공간이었지만, 숙연한 분위기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밝은 채광과 열린 구조, 가족 단위 이용자들을 배려하는 도서관이 되길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도서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유가족과 건축가 자신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서관으로 유입될 수 있도록 1층 경사로에 각별히 신경을 썼어요. 공원과 도서관이 별개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의 공간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지면 문턱이 훨씬 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진아도서관의 1층은 공원인 동시에 도서관이기도 합니다.”


붉은색 벽돌을 외장재로 사용한 이유 역시 서대문 형무소와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을 겪은 형무소 담장과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한 교수는 3cm 내쌓기를 시도했다. 돌출된 홈이 시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그려 내도록 하는 이 방식은 기존 형무소 담장과 근처 인왕산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도서관 마당 자리에 있던 퍼골라 기둥을 벤치로 전용했던 것 역시 훌륭한 선택이었다. 퍼골라는 우리가 흔히 등나무 벤치라고 부르는 야외 건축물이다. 한 교수가 이 퍼골라를 부수지 않고 남긴 이유는 기둥 벽돌에 선명하게 찍혀 있던 서울 경京자 때문이었다. 이 벽돌들은 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를 지을 때 사용됐던 귀중한 문화 유산들, 하지만 이진아도서관이 들어서면 꼼짝없이 허물어질 판이었다.


“이 벽돌 기둥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자로 재 보니 폭이 딱 의자 높이더군요. 그대로 기둥을 눕히고 나무를 덧대어 벤치로 만들었어요.”


그의 기지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던 경성 벽돌은 그 뒤 진행된 형무소 건물 보수에 다시 재활용되었다. 만약 한 교수가 아니었다면 독립 투사들의 아픔이 담긴 소중한 유산들이 우리 곁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간에 담긴 의미와 흔적을 이어 가려 한 그의 의지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장소의 의미를 살리려는 그의 섬세한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진아도서관 간판에 사용된 글자 역시 이진아 씨 본인의 친필 편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미국 유학 중에 보낸 편지를 가족들에게 받아서 글씨체를 그대로 살렸어요.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2005년 9월 15일, 고 이진아 씨의 생일에 맞춰 진행된 개관식 날 한 교수는 한 통의 편지와 CD를 받았다. 행사 뒤 열어 본 편지에는 '세진 엄마'라는 이름과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겨 너무 좋지만, 그래도 진아 양이 살고 도서관이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함께 받은 CD에는 여든여섯 장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건물이 올라가는 1년 6개월 동안 한 자리에서 꾸준히 찍은 사진이었어요. 보통 정성이 아니죠. 사진의 각도를 보고 무작정 아파트를 찾았습니다. 몇 시간 뒤 아이와 함께 들어서는 엄마를 보고 세진 엄마가 맞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맞다고 하더군요.”


명함을 건네고 돌아온 며칠 뒤, 세진 엄마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메일에는 집 주변에 도서관이 들어선다는데 주민으로서 자신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도서관이 지어지는 모습을 기록하자고 생각했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진심이 전해지면 다른 형태로 진심이 돌아온다는 걸 그때 느꼈어요.”


도서관의 주인은 시민이다


“도서관은 독서실일까요,

아니면 문화공간일까요?”


한 교수가 1970년대 도서관 풍경이라며 건물 앞으로 긴 가방 행렬이 이어진 사진 한 장을 화면에 비췄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이 도서관 앞에서 가방으로 길게 줄을 선 모습, 당시 도서관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진이었다.


“도서관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개가식 도서관으로 바뀐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전까진 대출증을 들고 사서에게 책을 신청하는 폐가식 도서관이 일반적이었죠."


많은 대학도서관 중에서도 서강대학교의 로욜라도서관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본래 서강대학교 본관 2층에 있다가 1974년 건물을 따로 신축하면서 독립했는데,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전면 개가식 도서관을 도입했다. 인쇄술이 지금과 같이 발달되지 않아 책이 귀했던 시절, 이는 대단히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폐가식인지, 개가식인지 하는 문제는 도서관의 구조와 바로 결부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건축과도 무관할 수 없다. 중세시대에는 책장이나 도서대를 사슬로 묶어 두었기 때문에 모든 책장이 사슬이 닿는 범위 내에 있어야 했다. 화재에도 예민했기 때문에 촛불을 대신할 창문도 근처에 있어야 했다.
반면에 개가식 도서관은 책의 관리보다 책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초첨이 맞춰져 있다. 책장은 개방돼 있고,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디자인돼 있다. 도서관이 어떤 공간이냐는 질문에 로욜라도서관은 '이용자와 책이 직접 만나는 공간'이라고 답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 과연 도서관이 필요할까란 고민을 해요. 무거운 책을 잔뜩 들고 다니지 않아도 태블릿 PC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거든요. 도서관이 왜 필요할까? 소설가 김영하가 이런 말을 했어요. 도서관은 '지적 네트워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이제 더 이상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선 다양한 인문학 강연이 펼쳐지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시민들은 지식과 교양을 나누는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한 교수가 앞에서 던졌던 독서실이냐, 문화공간이냐는 질문의 답을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진아도서관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는데, 한 여대생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신의 사춘기 때 가장 의미 있었던 공간이라고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뭉클했습니다. 내가 지은 건물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큰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될 수 있구나.”


한 교수가 건물을 설계할 때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 바로 건물은 삶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건물이기에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다. 시민들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길 바라며 그가 늘 최선을 다하는 이유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2016년에 또 다른 공공도서관을 설계했다. 바로 '영주선비도서관'이다.


“효율성보다는 시민과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도서관으로 설계를 했기 때문에 사서분들에겐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도서관 업무의 편의 때문에 시민들이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업무량이 많다면 사서를 더 채용해서 부담을 줄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진아도서관에 이어 영주선비도서관까지 설계한 그에게 공공도서관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도시의 거실'이라고 말한다. 그 도시의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 주는 공간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집의 거실처럼 자유롭고 편안해야 한다는 게 한 교수의 생각이다.


“결국 건축가의 자질은 얼마나 더 많은 고민을 하느냐로 결정되는 것 같아요.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거죠. 10년 뒤 다시 공공도서관을 설계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땐 또 어떤 설계를 할지 스스로도 기대가 됩니다.”


그때가 되면 그는 또 어떤 도서관을 선보일까? 한 교수 혼자만의 기대가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은 기대를 품는다. 분명 어떤 도서관이든 그 따스한 마음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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