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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자급]
버터번뇌
첫번째
전호용(2019-01-15 12:50:10)



순수하게 사람의 힘으로 우유나 산양유에서 버터를 추출해내는 일은 매우 고된 작업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기름을 만들어내는 작업보다 간단하고 덜 폭력적이다. 기계의 도움을 얻지 않고 식물에서 기름을 추출해내기란 요원할 뿐만 아니라 얻는다 하더라도 그 수고와 소비의 대가치고는 형편없는 것이어서 식물의 씨앗을 그대로 섭취하는 편이 낫다. 또한 동물이나 물고기에서 지방질을 얻기가 얼핏 간단해 보일지라도 자급의 형태로 놓고 본다면 사냥이나 목축, 어로행위를 통해 기름을 얻는다는 것이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살생의 고통까지도 참아내야 하므로 손쉽게 도살의 결단을 내릴 수 없고, 사냥이나 낚시가 간단키만 한 것도 아니다. 반면 버터는 소 한 마리, 소가 부담스럽다면 산양 한 마리만 잘 먹여 건사하면 젖을 얻을 수 있고 그 젖으로 버터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수고로움이나 불편한 마음이 여느 기름보다는 덜 할 수 있지 않을까.


버터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지만 육체적으로 고단한데다 정신적으로는 번뇌가 싹트는 고통을 참아내야만 하는, 단순노동의 결정체라 할만하다. 그 과정은 이렇다. 이제 막 산양유 한 사발을 짜냈다고 하자. 가공을 거치지 않은 생유는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지방과 수분이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이 중 위에 뜬 지방질이 생크림이다. 이 생크림을 밀폐용기에 담고 지방과 수분이 완전히 분리될 때까지 흔들거나 저어주면 버터가 만들어진다. 더욱 간단하게 말하자면 생크림이 버터가 될 때까지 끝없이 흔들다보면 버터가 툭 떨어진다. 말 그대로 툭 떨어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며칠 전 마트에 들렀다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초특가 생크림 다섯 팩이 눈에 띄어 무작정 사들고 집에 돌아왔다. 그 중 하나를 유리병에 담고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계속 흔들다보면 거품이 일어  찰랑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있는, 빵이나 커피 위에 얹어진 생크림, 즉 whipped cream이다. 여기서부터 번뇌는 싹뜨기 시작한다.


'과이연 이 고체에 가까운 액체는 흔들리고 있는 것이며 고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이 액체는 고체를 낳을 것인가'


버진갤럭틱을 타고 우주여행을 떠나는 이 시대에, 인류역사상 가장 풍요롭다는 시기에 나는 어찌하여 염소젖을 흔들어 버터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과연 풍요로운가. 나는 시대의 풍요속에서 시대의 풍요를 지탱하는, 나의 노동으로 풍요를 생산해 내기는 하되 초특가가 아니면 생크림 한 팩을 구입하는데도 고민이 들 만큼 가난한 작대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무슨 이유로 이 시대의 풍요를 떠받드는 작대기가 되어야만 하는가. 버진갤럭틱은 고사하고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내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우주여행을 고대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차라리, 나의 에너지가 순수하게 나의 밥으로 환원되기를, 남음이 있다면 나의 아내와 강아지와 젖을 내어주는 염소와 알을 내어주는 닭에게 나눠질 수 있기를, 그만큼만 지탱하는 작대기가 되기를 고대하는 꿈을 꾸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자급을 이야기하려 한다. 나의 노동이 초특가 할인되어 월급이라는 하찮은 가치로 쪼그라들지 않고 순수하게 나의 밥과 너의 밥이 되어가는 과정, 그 임계점을 통과해 나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찾아내는 과정을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버터의 임계점은 점이 아니라 길고 넓은 면이다. 생크림이 whipped cream이 되면서 임계점이 시작되고 팔뚝이 빠질 때까지 오랫동안 흔들어 미세한 유격이 발생하고, 덩어리가 단단해지고, 아주 약간의 액체가 찰랑거린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그 끝이니 그 점은 길고도 넓다. 그 길고긴 임계점을 통과하면 의심의 여지없는 버터 한 덩어리가 툭 떨어진다. 노동과 가치가 1:1로 정비례한다고 느껴질 만큼의 버터 한 덩어리 말이다.


마법이 아닌 실재하는 노동으로 만들어낸 한 덩어리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 넓고 긴 임계점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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