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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커밍아웃을 바라본느 시선에 대한 재고
완벽한 타인
김경태(2019-03-22 16:49:06)



40년 지기 고향친구들이 각자의 아내를 대동하고 '석호(이서진)'와 '예진(김지수)' 부부의 집들이를 위해 모인다. 그들은 핸드폰을 꺼내 놓고 모든 통화와 문자 내용을 공유하기로 한다. 그로 인해 그들의 은밀한 성적 욕망과 불륜 관계가 드러나면서 저녁 식사 자리는 아수라장이 된다. '태수(유해진)'의 경우, 자신에게 밤마다 야한 사진을 보내는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영배(윤경호)'의 핸드폰과 바꿔치기 한다. 그런데 영배의 전화로 태수와의 키스를 잊을 수 없다는 어떤 남성의 고백을 받으며 게이로 오해를 사고, 아내 '수현(염정아)'은 큰 충격에 휩싸인다. 태수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도 차마 영배가 게이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 갈등에 빠진다. 이제부터 영화는 꽤 비중 있게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사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집중한다.      


영배는 아직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 사이더라도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성 정체성은 다른 친구들의 은밀한 성적 욕망과 불륜 사이에 나란히 배치된다. 그것들은 친구들이 맺고 있는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 발설할 수 없는 비밀로서 공명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는 의문 하나. 과연 커밍아웃이 관계의 윤리적 문제와 동일한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는가? 즉, 성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이 여타의 성적 일탈들과 같은 층위에 놓일 수 있는가?


영화 말미에, 마침내 영배는 커밍아웃을 한다. 친구들은 게이라는 이유로 그를 부당하게 해고한 학교에 맞서 싸우라고 독려하고, 또 나중에 동성애인을 소개시켜달라는 배려의 말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건, 오히려 그가 저들(세상 및 친구들)의 동성애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불가능성을 역설하며 그들을 밀어내고 다시 벽장으로 들어간다. 재판을 하게 되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될 테니, 승소하더라도 진 거나 다름없다고 회의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친구들이 아무리 동성애인에게 잘 대해줘도 결국에 그들의 눈빛에 상처받을 것이라고 경멸하듯 토로한다. 친구들은 수긍하듯 고개를 숙인다. 이것은 그들의 속물적 본성과 맞닿아 있다. 앞에서 사랑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깠듯이, 앞에서 친절하게 대하더라도 뒤에서 욕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는 그대로 관객들을 향한다. 당신들이 리버럴한 척하며 쿨하게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은 가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관계에 대한 염세적 태도로서 애써 구축해온 정치적 올바름과 인권의식을 비웃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와 다른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완전히 이해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밀어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영배의 일갈은 비겁한 자기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 커밍아웃은 예의 그 익숙한 동성애혐오적인 반응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들통 난 불륜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난해하고 난감한 이유로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다.

불륜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이 잘못이지만, 커밍아웃은 동성애를 온전히 받아들지 못한(다고 가정된) 시대/상대방의 잘못을 환기한다. 설득조차 해보지 않은 채 온전한 이해를 바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적어도 혐오하지 않으며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가? 결국 나의 커밍아웃은 필연적으로 내가 아니라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없는) 상대방의 불완전성을 까발리는 비윤리적 행위가 되고 만다. 그래서 차라리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읍소하며 동정심에 호소하는 그 진부한 커밍아웃이 오히려 더 윤리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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