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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 | 연재 [유주환의 음악이야기]
"헨델, 이 여우같은 인간!"
유주환(2019-04-16 13:04:20)



바로크 음악의 아이돌 스타는 바흐와 헨델입니다. 독일말을 쓰는 그들은 모두 1685년에 태어났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그들 삶의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흐가 일생을 아른슈타트Arnstadt, 바이마르Weimar, 쾨텐Köthen, 라이프치히Leipzig의 지역 음악가로 살았던 반면, 헨델은 할레Halle, 이탈리아, 영국에서 활동한 작곡가였습니다. 바흐가 주로 지역의 궁, 의회, 교회에 헌신하는 사이, 헨델은 대규모 오페라, 오라토리오, 왕이 후원하는 음악에 매진했습니다. 바흐가 고용과 계약에 발목 잡힌 고단한 생활을 이어간 반면, 헨델은 타고난 사업 술로 두둑한 지갑을 유지했습니다. 바흐는 죽음과 동시에 거의 잊혔지만, 헨델의 명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여전했습니다.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로 소개했던 어릴 적 교과서는 헨델을 또한 어머니로 묘사합니다. 시험에도 단골로 등장했습니다. 세계 어느 음악책에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표현, 그 표현의 속내를 짐작할 것도 같습니다만 예술가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이런 선입견이야말로 참 위험하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악성樂聖 베토벤이라는 전형typifying에는 이것이 내포하는 말 몇 개가 있습니다. 몸의 결함, 전투적 삶, 불굴의 정신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듯, 베토벤은 컨디션이 좋기도 나쁘기도 했으며, 이웃과 정감 어린 대화를 나누거나 다투거나, 아이처럼 행복하거나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본디 사람의 감정이란 기복의 연속입니다. 장애를 가진 인생 전체를 아수라로 전제하고 그가 그의 지옥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에만 집중한다면, 이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봉쇄해버리는 일입니다. "쇼팽에 관한 최악의 편견이란, 그를 그저 아름다운 음악의 작곡가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앙드레 지드의 불평도 그 선입견을 겨냥한 것입니다. 음악의 낭랑한 시인만으로 쇼팽을 단정 짓는 순간, 우리는 그 음악에 담긴 실험정신과 종종의 기괴함을 놓치게 됩니다. 플라톤의 말마따나, '△△은 (반드시) ○○이다'라는 선동적인 편견, 왜곡된 수사가 바흐와 헨델을 바로크의 '아빠'와 '엄마'로 만든 셈입니다. 역사의 개척에 남녀가 따로 있겠습니까만, 백 번쯤 양보해서 바흐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더하게 된다면,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바흐는 음악이 극심하게 변화하고 있을 무렵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 중심의 다성적 선법 음악이 쇠락하고, 기악의 완성도가 극대화되었으며, 무엇보다 조성에 관한 새 패러다임이 작동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때 바흐가 조성 음악의 장단조를 깨알로 세심하게 분류한 작품 하나를 만들었는데요.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라 알려진 두 세트 작품에 담긴 실험 정신이 그를 전환기의 근대 음악 개척자로 각인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봐도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로 단정할 근거가 없다, 그게 저의 생각입니다. 일단 호칭부터 수상하잖아요. 성적 편견이 담긴, 어머니라는 표현의 뿌리는 아무래도 그 말이 가진 모성을 바탕했거나, 아니면, 바흐를 일단 아버지라 불렀으니 헨델은 어머니!, 라는 소박한 의식의 어세인 듯합니다. 그 둘이 같은 해에 태어났고, 넘치는 명인이며, 회자됨으로도 역사에 으뜸이니 아버지와 한편 어머니로 대구對句하려 했던 취지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만, 근대음악으로의 가교가 바흐의 명백한 업적인 반면, 헨델은 (겨우!) 시대의 음악적 트렌드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둘 비교의 어조에 당위가 없으며 짝말의 형세도 불편합니다.

제가 헨델을 아랫수로 업신여긴 듯 읽히셨다면 여러분의 용서를 빕니다. 사실 그의 음악은 바로크 후기의 음악 지세를 상징하는데 손색이 없습니다. 그 음악을 통해 당시의 중산이 어떤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봉창 두드리는 '엄마'라는 표현은 집어치우고, 대신에 살필 수 있는 그의 면모 하나를요.  


인생이란 수많은 선택의 '사다리 타기'다, 라고 저의 군대 선임이 말했습니다. 만일 인생이 매우 그런 것이라면, 이 사다리에 관한 헨델의 감각은 단연 갑입니다. 1703년 그가 함부르크의 '대세 음악가'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때, 헨델은 메디치의 군주를 쫓아 이탈리아로 가는 사다리를 선택합니다. 그때 호사가들은 헨델의 결정을 매우 무모하다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음악을 배우고, 그 평생의 이탈리아 인맥을 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하노버Hanover에 돌아온 뒤 직장도 팽개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버리자, 호사가들은 그가 새로 선택한 사다리를 매우 위험하다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자신을 고용했던 영주가 영국의 다음 왕으로 유력했던 조지prince George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의 헨델이 많이 이상합니다. 헨델이 미래의 영국 왕이 될 군주와 만세무강을 바랐다면, 지금 그에게 먼저 충성해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하지만 헨델은 일반이 이해하기 어려울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새로 갈아 탄 그의 사다리가 신의 한 수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 헨델이 저지른 일과 결과를 요약해 보면, ⓵ 하노버의 악장을 때려치운다. ⓶ 군주는 헨델의 갑작스러운 사직에 열 받는다. ⓷ 영국에 간 헨델은 유력자 조지와의 친분을 팔아먹는다. "나 왕하고 친합니다." ⓸ 미래 권력과 가깝다는 헨델에게 영국 조야朝野의 관심이 집중된다. ⓹ 귀족에게 연금을 받으며 정착에 성공한다, 입니다.

조지는 독일계의 첫 영국 왕입니다. 할 줄 아는 영어라고는 '헬로'가 전부였던 그를 뜬금없이 왕으로 세운 배경에 종교가 있습니다. 그때 영국의 법은 카톨릭 신자가 왕이 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조지가 그의 전임 앤Anne, Queen of Great Britain과 아주 인척은 아니었지만, 신교도라는 이유로 계승자가 된 것입니다. 조지는 생애 대부분을 독일말로 살아왔으며 권력에 관심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의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내각이 통치를 대신하게 하는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헨델이 하노버의 악장이던 시절, 유럽의 관심사는 온통 영국의 계승문제였습니다. 이때 스물다섯 그의 감각이 여우로 발휘됩니다. 세론을 통해 그는, 후사 없는 여왕의 건강 문제, 상속자인 하노버의 조지, 그리고 새 왕이 누리게 될 컨벤션 효과, (동시에) 영국에 관해 무지한 왕의 정치적 한계를 꿰뚫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헨델에 비친 미래는, ⓵ 허수아비 왕보다는 전통적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가 더 중요하다, ⓶ 영국은 외래 음악가에 호의적이다, ⓷ 나는 이탈리아 음악에 자신이 있다, ⓸ 영국은 넓은 아마추어 합창음악 시장을 가졌다, ⓹ 게다가, 외로운 왕과 독일인인 자신의 관계는 '나 하기 나름'이다, 라는 확신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역사는 그때의 그를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렇게 헨델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조지를 이용해 세상의 관심을 얻었고, 왕의 정치적 은둔으로 귀족이 득세하게 되었고, 헨델은 귀족을 이미 구워삶아 놓았으며, 하노버에서의 무례에 열 받아 있던 왕의 마음도 얻어냈습니다. <수상음악Water Music>같은 작품은 헨델이 행한 그 노력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여우같은 혜안이 다시 작동합니다. 그는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꿰뚫어 보고, 허영이 반영된 이탈리아 오페라와,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와, 합창 음악과, 한 개도 못 알아먹을 이탈리아말 음악을 대신할 영어 오라토리오를 만들었습니다. 영어로 쓴 <메시아>의 '할렐루야'를 듣고 왕이 감격으로 일어섰다는, 진위가 의심되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도 마케팅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에서 음악가란 거의 가진 자의 호구이며 을의 을이기 마련이건만, 헨델만은 그 지경에서 신분을 초월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 종종의 여우 짓을 다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 윤리 교과서의 본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그 처세를 바탕으로 그는 42개의 오페라, 29개의 오라토리오, 16개의 오르간 협주곡, 120개가 넘는 칸타타, 트리오, 이중주, 종교음악을 인류에게 선사하였고, 그 이유로 역사는 헨델을 바로크의 큰 기둥으로 기억합니다. 이미 음악만으로도 기둥 삼기 넉넉할 헨델인데, 굳이 '음악의 어머니' 따위의 말장난으로 그를 묶어 두는 것은 헨델과 그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 그래서 생애 대부분을 영국에서, 그렇게 영국인이 된 그를 영국이 내내 자랑스러워하는 이유, 이제 가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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