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9.5 | 연재 [여행유감]
좋은 것, 나쁜 것, 모든 찰나와 마주하기 위해 우린 떠난다
이유경의 여행, 스페인에서 만난 순간의 트렌카디스
이유경(2019-05-31 15:34:22)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여행을 꽤 자주 다닌 편이었다. 방학이면 산이든 바다든 도시든 어디든 한번은 다녀왔던 것 같다. 하지만 언니와 내가 성인이 되고 고향을 떠나 살게 되면서부터는 전처럼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일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 모두 함께하는 해외여행을 기획하게 되었고, 여행지는 스페인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다녀오게 된 작년 1월의 스페인 여행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여행이 되었다. 우선 부모님과 언니와 나, 넷이서 떠나는 10여 년만의 해외여행이기도 했고, 가족 해외여행으로서는 첫 자유여행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여행 일정도 숙소도 모두 우리가 직접 알아보고 예약하면서, 온전히 우리끼리 만들어간 여행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보다 개인적인데, '여행'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계기를 내게 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여행이 자연스러웠던 나는, 여행 자체의 의미나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냥 부모님이 가자고 하니까 갔고, 가면 재밌게 놀았고, 재밌었으니까 다음에 가자고 할 때 또 따라 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맞닥뜨리게 된 예상치 못한 몇몇 순간들은 나를 새삼스러운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도시는 카탈루냐 지방의 대표 도시이자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우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바로 '구엘 공원'이었다. 구엘 공원은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명소로, 본래는 전원 주택단지로 조성할 예정이었으나 재정상 이유로 완성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사들여 현재까지 시립 공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명성에 걸맞게 구엘 공원은 과연 독창적인 건축물과 조형물로 가득했다. 입구의 경비실과 기념품 상점은 동화 속의 과자집을 연상시키고, 2층 광장들 떠받치는 기둥들은 곧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도 파도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또한 깨진 유리와 타일 조각들을 세밀하게 이어붙인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장식들은 공원 곳곳을 형형색색으로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인 관광지답게, 공원은 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바글바글 붐비고 있었다. 공원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트렌카디스 기법으로 장식된 벽면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도, 인파 때문에 만원 버스에 탄 것처럼 피곤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특히 구엘 공원의 인기 스타인 도마뱀 분수대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지나가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공원 2층으로 올라가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중앙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벤치는 구불구불한 형태와 화려한 장식으로 유명 명소이자, 바르셀로나 시내를 어느 정도 조망할 수도 있는 전망 포인트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바람이 시원한 정도를 넘어서서, 곧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든 수준으로 거세게 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공사 중인 광장의 모래먼지까지 바람에 가세하여, 우리는 잠시 뒤 모래먼지를 뒤집어쓴 꼴로 공원에서 내려와야 했다.


우리의 첫 여행지였던 구엘 공원을 인파와 모래바람 때문에 기대만큼 즐기지 못하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여행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한 뒤 다음 목적지인 '구엘 저택'로 향했다. 그런데 몹시 불쾌하고 황당한 일을 겪고 말았다. 길목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오던 한 외국인이 난데없이 엄마를 향해 '푸' 하고 침을 뱉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듯 보인 그 행인은 사과 한 마디 없이 가버렸다고 했다. 인종차별의 표현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 그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다분히 고의적이고도 악의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전해 들었을 뿐이었는데도 다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봉변을 직접 겪은 엄마가 받은 상처가 컸다. 가뜩이나 감기로 인해 컨디션 난조를 보였던 엄마는, 구엘 저택에 입장하여 실내를 구경하는 동안에도 계속 기운이 없어보였다. 저택은 궁전처럼 으리으리하고 화려했지만,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다. 나는 왠지 침울해졌다.


그날 밤 숙소에서 생각에 잠겼다. 거의 1년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했던 가족여행이었다. 그 기다림과, 분명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책과 TV와 인터넷 속에서만 보던 스페인의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그런데 고대했던 스페인 여행의 첫 날은 어쩐지 맥이 빠졌다. 가족들 앞에서는 그런 기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애써 숨겼지만, 숙소에 들어와 쉬고 있으니 피로가 몰려왔다. 이 여행이 과연 무사히, 즐겁게 끝날 수 있을 것인지 불안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왜 이곳에 왔을까? 우리는 무얼 위해 여행을 떠나는 걸까? 나는 이번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다음날 우리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세비야를 시작으로 론다, 말라가, 그라나다, 코르도바, 톨레도 등의 도시들을 관광했다. 같은 스페인임에도 기후도 역사도 상이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 도시들은 바르셀로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물론 안달루시아 안의 도시들끼리도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 초반에 싹텄던 나의 걱정과 불안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도시들을 여행하는 동안 점차 녹아내려갔다. 그 전환점이 되어준 도시는, 말라가 주 북서부에 위치한 인구 3만 6천여 명의 소도시 '론다'였다.


스페인에서 제일 오래된 투우장이라는 '플라사 데 토로스'라는 론다 투우장의 구경을 끝마칠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군악대 음악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동방박사의 날' 전야제 퍼레이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동방박사의 날'이란 동방의 현자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를 드렸다는 일을 기념하는 축제로, 가톨릭 전통이 강한 스페인에서는 무척 뜻 깊은 날이다. 또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 했던 것을 기념하여 스페인의 어린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아닌 동방박사의 날에, 산타가 아닌 동방박사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전날 저녁에는 스페인 전역에서 동방박사로 분장한 사람들이 행진하며 사탕을 뿌리는 축제를 벌인다.


투우장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분장을 하고 행진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흥겹게 악기를 연주하고, 일부는 색종이와 엄청난 양의 사탕을 거리로 뿌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행진을 구경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신나서 사탕을 줍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양손 가득 사탕을 줍는 아이들도 있었고, 아예 커다란 봉지를 가지고 나와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쓸어 담는 어른들도 보였다. 우리도 얼른 합류해서 사탕을 주워 담았다. 가끔 날아오는 사탕에 맞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행진이 끝나자 하늘 위를 수놓는 불꽃놀이로써 축제는 마무리되었다. 여행 일정 중 동방박사의 날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커다란 축제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그야말로 동방박사들에게서 깜짝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축제의 열기로 들떴던 전날과는 달리, 동방박사의 날 당일 아침이 되자 론다는 매우 한산하고 조용했다.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공기를 더욱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우리는 쿠엔카 공원을 따라 고요한 거리를 산책했다. 한쪽으로는 아랍 목욕탕 등의 유적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형성했고, 다른 한쪽으로는 론다의 상징과도 같은 명물 '누에보 다리'와 엘타호 협곡이 절경을 이루었다. 쿠엔카 공원 산책을 마친 뒤에는, 론다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하였다고 알려진 헤밍웨이의 이름이 붙은 '헤밍웨이 산책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이번에는 협곡 옆으로 녹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탁 트인 평원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시력이 좋아질 것 같은 풍경이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 마음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니와 나는 언젠가 이곳에 또 오고야 말겠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동방박사의 날 전야제 축제라든가, 협곡을 배경으로 한 절경들은 여행 중 예상치 못하게, 혹은 예상을 뛰어넘어 마주친 순간들이었다. 돌아보면, 스페인 여행에 대한 나의 기억은 결국 그런 '순간'들의 모음집인 것 같다. 론다에서와 같은 강렬한 순간들 외에, 작고 소소한 풍경들이 마음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 솥뚜껑처럼 생긴 특이한 악기로 버스킹을 하던 사람, 작은 광장에서 탁 탁 소리를 내며 자유롭게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사람들, 주황빛 오렌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가로수길, 은빛이 감도는 녹색잎의 올리브나무 들판과 구름이 맞닿은 지평선, 언덕등성이에 무심히 자라있는 선인장들을 보았을 때 그랬다. 왠지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풍경들이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는 건 결국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기 위함인 것 같다고. 물론 그곳에서 기분 좋은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 기분 나쁜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 미리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여행지에서는 기대와 달라서 실망을 하거나, 불쾌한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어떤 여행지에서는 선물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다. 어떤 순간을 마주할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현재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결국,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마음껏 현재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것이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이번과는 다른 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또한 기대된다. 어차피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정답이란 없을 테니까, 여행을 다닐 때마다 여행의 의미를 하나씩 늘려가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