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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자급>]
만경강
일곱 번째
전호용(2019-07-17 11:09:07)

나는 만경강에서 1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낳고 자랐다. 내가 살던 마을 옆을 흐르던 만경강은 강의 하류 부근이어서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이었다. 기수지역이 좁은 강도 있고 넓은 강도 있는데 만경강의 기수지역은 유난히 넓어 그 이름을 '만경(萬頃)'이라 지었다. 만경이란 넓은 들을 뜻하는데 썰물 때 물이 빠져나간 강을 보면 말 그대로 만개의 이랑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어미의 언어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바다를 강이라 말한다.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바다를 사람들이 강이라 말했기 때문에 바다를 말할 때 강이라 말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묻지마 관광으로 다녀온 동해는 넓은 강, 조개 잡으러 다녀온 고창 앞바다는 갯강, 서울 딸네 다녀오며 보았던 한강은 그냥 한강. 그럼 바다는 뭐냐고 물으면, "강을 바다라고도 허는 거시지!"



만경강은 넓은 들을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라 강물이 탁하다. 상류인 고산, 봉동을 흐르는 물은 그나마 맑지만 전주천과 만나 삼례를 지나면서부터는 강물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익산을 지나 김제에 이르면 흙탕물이 되어 우리 마을 앞에 다다른다. 나는 그 흙탕물에서 동무들과 물장구치고, 조개 잡고, 게 잡고, 물고기 잡아먹으며 자랐다. 놀만한 깨끗한 물이 없어 흙탕물에서 놀았던 것이지 어린 것이라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초등학교 선생님과 함께 춘장대 해수욕장을 가게 되었을 때 바닷물이 그리도 맑고 깨끗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으니 촌놈도 보통 촌놈은 아니었던 거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섬진강에 다녀왔다. 섬진강은 두꺼비 섬(蟾) 자에 나루 진(津) 자를 쓰는데 옛사람들은 달에 토끼가 아니라 두꺼비가 산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두꺼비 섬(蟾) 자는 달빛을 뜻한다. 직역하자면 달빛나루인데 나루 진(津) 자는 깊다거나 가득하다는 뜻으로도 쓰이므로 달빛 가득한 강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달빛을 가득 품은 강인데, 달빛을 맑게 비출 만큼 강물이 맑기도 하거니와 달 비춘 강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고 물이 맑아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에서 물놀이를 하고 재첩을 건지며 하루를 보냈다.


깨끗한 모래 위를 맑게 흐르는 강. 임실, 순창, 곡성을 지나 구례, 화계, 하동에 이르기까지 이 강이 만지고 지나가는 곳에는 흙이 없다. 남원에서 흘러드는 지류에도 없고, 지리산에서 합류하는 계곡물도 바위를 타고 내려온 물들이다. 그러니 하동, 광양에 이르러서도 물이 맑고 강바닥에는 깨끗한 모래가 가득하다. 한때 나는 이렇게 맑은 섬진강에 샘을 냈었다. 내가 살던 만경강이 이처럼 맑고 아름다웠다면 그렇게까지 그 땅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탁한 강과 넓은 들은 청소년기의 나를 숨 막히게 했었다. 그 숨 막혔던 10대의 나를 떠올리며 섬진강에서 생을 살아냈을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그들에게 섬진강은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듯싶었다. 흙 한 줌이 아쉬운 이 땅에서 밭을 일궈 농사지어 놓으면 하루 장대비에 모든 것이 쓸려내려가는 것이 일상이었을 그들에게 달빛 가득한 푸른 강은 귀기 가득한 두꺼비 아가리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삶이 질려버려서, 맑은 강에 치가 떨려 고향을 등지고 떠났을 내 또래의 어느 중년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게 떠나고 싶었던 만경강인데 나는 여전히 만경강을 옆에 두고 살아간다. 유년기는 하류에서, 청년기에는 전주천과 만경강 중류 일대에서 살아가다 지금은 상류 근방에서 마당쇠와 서성거린다. 따지고 보면 만경강은 섬진강처럼 그렇게 미워할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범람해 논과 밭, 집을 휩쓸고 지나가는 일도 없다. 또한 봉동에서부터 삼례, 익산, 김제, 대야, 옥구에 펼쳐져 있는 대부분의 들은 처음 강물이 흐르면서부터 강이 범람해 쌓아준 땅들이다. 만경강은 본디 흐른다기보다는 넓게 퍼져나가는 형태였는데 그 땅을 탐한 사람들이 제방을 쌓아 흐르는 강으로 만든 것이다. 고산부터 옥구 하제까지, 또는 전주 삼천부터 부안 심포까지 제방이 쌓이지 않은 곳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제방 양옆으로 너른 들이 펼쳐지는데 그 모두가 한때는 만경강이었다고 상상해 본다면 강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내어주고 이렇게 하찮은 개천이 되어 늙어버렸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섬진강에서 걷어 올린 재첩으로 전 부치고 국 끓여 맛있게 먹긴 했다만 새만금 막히기 전의 만경강에서 잡아 올린 크고 실한 조개와 새우, 게 따위를 떠올리면 하찮고 하찮다. 그런들 어쩌겠나. 이제는 재첩만한 바지락 한 개 남지 않았는데.... 가끔 한가할 적에 강에 낚싯대 드리워보지만 붕어 얼굴 보기도 힘들고 블루길만 신이 나서 낚싯바늘에 낚여 올라온다. 이럴수록 갯것 비린 맛 생각에 입안에 침이나 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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