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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내일이 없는 유령, 반성과 구원의 시간을 구축하다
밤의 문이 열린다
김경태(2019-09-17 11:25:23)



'혜정(한해인)'은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공장에서 일하며 허름한 동네에서 2명의 하우스메이트와 살고 있다. 매일 저녁 바래다주던 동료로부터 구애를 받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는 그녀는 거절한다. 홀로 귀가하게 된 그녀 앞에 소녀 '수양(감소현)'의 도와달라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지만 외면한 채 급히 집으로 달려 들어온다. 여느 날처럼 귀가한 혜정은 자신의 방에서 유령이 된 채 눈을 뜬다. 그녀는 하우스메이트인 '지연(이자민)'의 동생 '효연(전소니)'의 칼에 찔려 혼수상태가 된 채 병상에 누워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효연이 혜정의 돈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여타의 공포영화나 스릴러영화와 달리 살인의 순간은 설명/전시되지 않으며 그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장르의 익숙한 문법이나 서사의 논리적 전개보다는 정서적 호흡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유령은 타자의 대명사이자 절대적인 타자이다. 타자란,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을 당하고 무시되는 속성 때문에 타자이다. 따라서 유령은 그 자체로 타자의 신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은유이다. 혜정의 내레이션처럼, 내일이 없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다. 그 내일이 없는 유령의 삶은 (가난과 차별 때문에) 미래가 없는 타자의 그것과 공명한다. 유령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며 진보와 발전의 시간 대신에 반성과 구원의 시간을 구축한다. 혜정은 과거로 거슬러 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차마 돌보지 못했던 타자들과 연대하며 산자의 시간에 균열을 낸다. 유령의 다른 시간성은 다른 목표를 상정한다.


혜정은 특별하게 이기적이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남을 이용한 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녀는 팍팍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연애조차 사치라고 생각할 만큼 묵묵히 일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에게조차 가혹한 금욕적인 근면성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특히 하층계급에게 강요하는 미덕이기에, 그녀의 죽음은 일면 아이러니해 보인다. 감독은 평범함으로 포장된 그 미덕의 비인간성을 고발한다. 이제는 그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음이 임박한 혜정은 자신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다. 그녀는 유령이 된 수양의 구해달라는 목소리를 외면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이 금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빌려주지 않아 효연이 살인을 저지르게 방치한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유령이 된 후에야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눈을 뜨며 차가운 인간은 따뜻한 유령이 된다. 결국 그녀가 후회하며 궁극적으로 되돌리고 싶은 건,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생전 부족했던 이타심이다.


효연은 혜정에 앞서 악독한 사채업자인 '광식(이근후)'을 죽였다. 오히려 그는 선한 것으로 가정된 자본주의 체제를 악용하기에 처벌받아 마땅할지 모른다. 그러나 혜정은 그를 살리고자 애쓴다. 그는 수양이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자본주의적 가치판단으로 재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광식을 구하고 효연이 살인범이 되는 것을 막고 혜정은 사라진다. 병실에 누워있던 혜정은 잠시 눈을 떴다가 이내 숨을 거둔다. 현실로 틈입한 유령의 시간에서 자신의 생존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대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타자들 간의 연대가 지닌 가치를 생성한다. 그리하여 혜정이 광식을 죽이려는 효연을 막는 행위는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범죄이고 인간의 목숨은 누구나 귀중하다는 보편적 교훈이 아니라, 효연의 삶에 대한 희망을 붙잡고 수양과 광식의 부녀관계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명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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