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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역사의 악순환을 멈추기 위해 관계의 감각을 벼리다
벌새
김경태(2019-10-15 14:23:46)



<벌새>는 1994년으로 들어가 중학교 2학년인 '은희(박지후)'의 일상을 그의 눈높이에서 집요하게 뒤쫓는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90년대의 가족/이웃 공동체를 향수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런 공동체가 은희에게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욕설을 쏟아내는 가부장적인 아빠와 주먹질을 일삼는 오빠, 자신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는 엄마, 몰래 데이트를 하기 위해 자기를 이용하는 언니까지. 지난밤 서로를 향한 폭언과 몸싸움은 날이 밝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익숙한 일상 속으로 희미해진다. 모두가 그렇게 습관처럼 반복되는 폭력에 무뎌져 간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소파 밑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부서진 전등의 파편처럼 그날의 기억은 문득문득 고개를 든다. 가정은 그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은희는 자신의 지친 마음을 둘 곳이 간절하다. 현재를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그에게 미래를 대비할 여유는 없다. 다행히 또래의 남자친구를 사귀며 숨을 돌리지만, 그로 인해 학교에서는 공부도 못하면서 연애나 하는 '날라리'로 찍힌다. 그러나 이내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새로운 정박지를 찾아 헤맨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 후배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잠시 새로운 연애를 하고, 한문학원의 여대생 교사 '영지(김새벽)'의 진심어린 위로와 맞서 폭력에 맞서 싸우라는 독려에 온 정신을 빼앗긴다. 남들이 그 관계를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든, 자신을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로 규정짓든, 혹은 그 모든 감정이 너만의 착각이라거나 덧없는 것이라고 조롱하든 관심이 없다. 은희에게는 내가 누구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누구와 함께 소통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시대를 드러내는 지표적 사건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고 인물들의 구체성은 결핍되어 있다. 엄마는 왜 가끔씩 은희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지, 외삼촌은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영지는 왜 그렇게 인사도 없이 급히 사라져야 했는지에 대해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그 설명의 부재와 설득의 생략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불가해한 세상에 대한 은희의 감각에 집중하게 한다. 영화는 후반부로 가며 마침내 성수대교 붕괴라는 당시의 구체적인 재난에 직면한다. 일상의 내밀한 스케치는 관객이 공유하는 공적 기억과 마주한다. 등교하던 여고생들이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었지만, 다행히 은희의 언니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비보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살아남은 이들은 살아남은 대로 아프다. 새벽에 다다른 무너진 성수대교 앞에서 은희는 추모를 한다. 관계를 향해 예리하게 벼른 감각이 빛을 발한다.   


정확히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성수대교 붕괴는 더 큰 재난의 형태로 회귀하며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고 보니, 현재는 그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시대의 분위기는 그대로 현재와 공명한다. 왜 감독은 현재와 닮은 과거로 향하는 것일까. 과거는 현재의 은유이자 반추하는 거울이다. 날라리와 모범생, 노래방과 서울대 등 양분화된 계급의 낙인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워진 것일까. 여전히 힘없는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죽어나가는 않는가. 재개발을 넘어 등장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살던 곳에서 내쫓기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은희는 영지와의 만남 후 비로소 등하교 길에 무심코 지나치던 재개발 지역을 돌아본다. 그는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을 불쌍하다고 말한다. 영지는 알 수 없는 이들을 함부로 동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싸구려 동정심은 너와 나를 구분 지을 뿐이다. 시대에 대한 이해가 동정심에 머문다면 그 어두운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동정하기에 앞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관계를 향한 감각을 단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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