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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 | 연재 [전호용의 음식 칼럼 <자급>]
냉장고를 비웠다
열 번째
전호용(2019-10-15 14:26:03)

두 달 전부터 냉장고를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술부터 치웠고(물론 마셔서 치웠다) 채소를 쌓아두지 않기로 했다. 채소는 그때그때 필요한 양만큼만 밭이나 들에서 구해다 먹고 구매해야만 하는 채소는 최대한 빨리 먹어 치우기로 했다. 냉동식품들을 먹어치우고 다시 채워 넣지 않았다. 밑반찬과 김치 등도 먹어치우고 다시 만들지 않았다. 이제 냉장실에는 장과 장아찌, 김장김치와 깻잎김치 정도만 남았고, 냉동실에는 도토리가루와 밀가루, 고춧가루, 버터 몇 덩어리, 멸치와 다시마 정도만 남아있다.


살다 보니,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특별하거나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져버렸다. 먹던 장(간장, 된장, 고추장, 액젓)과 몇 가지 필수적인 양념(소금, 고춧가루, 후춧가루, 들기름) 정도만 있으면 그때그때 있는 재료를 이용해 밥상이 차려지고 밥이 먹어진다. 쌓아두고 쟁여두지 않아도 때가 되면, 계절이 도래하면 자연스럽게 먹을 것들이 생겨난다.


집 앞 길가의 도랑에는 사시사철 미나리가 올라오는데 생각해보면 지난 1년간 세 번 정도 뜯어다 먹은 것이 전부였다. 이유는 미나리 말고도 초봄에는 쑥과 냉이가 주인 없는 들판에 널려있고 조금 지나면 머위를 뜯어다 무치고 들깨탕을 끓이느라 바빴다. 고사리도 먹어야 하고 감자도 먹어야 하고 옥수수도 먹어야 하며 깻잎 따다 김치 담고 고걸 쪄 먹기도 해야 한다. 이걸 삼시 세끼 만날 차려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일주일에 많아야 대여섯 끼 먹는데 냉장고에 쌓아 둬봐야 썩어나가는 게 태반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먹고 싶다거나 맛집에 찾아가 유명세를 타는 어떤 음식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웃길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만들어 먹는 음식보다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은 별로 없다. (내가 특별히 애정해서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찾아가는 맛집은 전주에 이연국수, 운암콩나물국밥, 군산에 뽀빠이냉면, 예산에 한일식당, 서울 광장시장에 녹두빈대떡 정도다. 메뉴만 봐도 얼마나 촌스러운지 알 수 있지 않나.) 혀가 늙은 거다. 내가 만든 장의 맛과 간과 요리법에 익숙해져 버려서 다른 요리법과 새로운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이다.


강원도를 여행하다 나이 90을 넘긴 노인 한 분을 만났었다. 그날은 마을 잔치가 벌어졌는데 식탁에는 기름에 튀기고 굽고 지지고 찌고 삶고 끓인 수많은 음식들이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었다. 나는 노인 옆에서 함께 밥을 먹었는데 노인이 입에 대는 것이라곤 어죽과 오징어회에 곁들인 소주 몇 잔뿐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젊어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물었더니 젊어서부터 나이 70이 넘을 때까지 오징어배를 탔노라 말했다. 평생 먹어온 오징어회와 매년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과 모여 먹었을 어죽 그리고 물보다 많이 마셨을 소주. 나는 그날 노인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간 저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혓바닥이 무료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강원도에서 노인을 만났던 그 해 나는 전국을 떠돌며 여행을 했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만 있다면 자연은 나를 굶겨 죽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떠난 여행이었다. 돌이켜보면 가진 지식과 다짐이 부족해 실패한 여행이 되어버렸지만 아직까지도 자연은 사람을 그냥 굶겨 죽이진 않는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같은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는 처음이었으니 여행이라 말했지만 다음에는 삶을 그렇게 마무리 지으러 떠나는 것이라 여행이란 말은 뺄 것이다. 여기에 스콧 니어링이나, 데이빗 소로우, 레이첼 카슨 같은 사람을 끌어들이며 당위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단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삶에 도통 적응을 못하겠는 것이고, 돌이켜 보았을 때 그나마 자연이 주는 것을 먹고사는 것이 사장님이 주는 월급으로 먹고사는 것이나 고객님이 주는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보다 행복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다.


우선 냉장고를 비우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고 위장도 편안하다. 이제 마당쇠 데리고 산책이나 가련다. 자연에서 먹고사는 유일한 길은 발품이다.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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