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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 | 연재 [수요포럼]
월인천강, 우리가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이유
글자 너머로 보는 인간과 사회, 문화와 과학
도휘정(2019-11-15 10:50:57)

타이포그래피 연구자 유지원의 고향은 전주다. 비록 태어나기만 하고 성장은 다른 곳에서 했으니 고향보다는 출생지라는 말이 더 가깝지만, '지초 지(芝)'와 '계집 원(媛)'을 쓰는 그의 이름은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어쩌면 그의 핏속에는 완판본의 문화가 흘러 그를 글자의 세계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그를 '과학자의 머리와 디자이너의 손과 시인의 마음을 가진 인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정확했다. 그는 글자와 글자 사이의 공간을 계산하는 과학자이자 글자의 작은 부리 하나를 고민하는 디자이너였으며, 노인이 읽기 쉬운 폰트를 연구하는 가슴 따뜻한 인문주의자가 맞았다. 


지난 10월 16일, 『글자 풍경』의 저자 유지원 씨가 '제196회 마당 수요포럼'을 찾았다. 



서양의 글자 풍경
알프스를 넘으면 모든 것이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창밖 풍광이 변해가듯 글자도 변화한다. 이탈리아의 따뜻한 햇볕 아래서 글자들은 기지개를 켠다.
“독일 글자가 수직성이 강한 침엽수림 같다면 이탈리아 글자는 둥글고 넓은 활엽수 이파리 느낌이 나요. 독일 글자는 폭이 좁고 어둡고 뾰족해요. 독일에선 20세기 중반까지도 '블랙레터(Blackletter)'라고 불리는 양식의 글자체들이 널리 쓰였어요. 이름 그대로 획이 굵고 흰 공간이 좁아지면서 전반적으로 검게 보여요. 반면에 이탈리아적 글자체는 '화이트레터(Whiteletter)'라고 불러요. 정식 명칭은 '로만체(Roman Style)'로, 흰 공간이 크고 밝으며 폭이 넓고 비례가 풍부하죠."
햇볕을 따라 토양의 성질이 달라지고, 그 토양 위에서 자라는 나무의 종류도 달라진다. 나무에 따라 이파리 모양이 달라지고, 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도 다르다. 그러니 공기를 진동하며 전달되는 사람의 말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글자는 이렇게 환경과 지역의 성격과 반응하며 달라진다.
그럼에도 탈지역, 탈시대적 성격을 띠는 폰트도 있다. 오늘날 공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헬베티카체다. 헬베티카는 1957년 스위스에서 만들어졌다. 이름도 스위스의 옛날 명칭인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왔다.
“유럽에서 스위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덜 겪은 국가였습니다. 스위스같이 조그만 나라가 열강들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살아남았다니, 그 생존능력이 정말 대단하죠? 스위스는 독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위스 로만어 총 4개 국어를 쓰는데, 인쇄물을 출간할 때 최소 독어, 프랑스어, 영어, 3개 국어로 나옵니다. 이때 중립적 성격을 지닌 폰트를 썼어요. 탈지역적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거죠. 획의 줄기 끝부분에 튀어나온 돌출 부분, 즉 부리가 없는 고딕체인 산세리프체를 많이 썼죠."
헬베티카는 산세리프체를 대표하는 폰트 중 하나다. 다른 산세리프 서체보다 짜임새가 촘촘하고 가독성이 우수하며 현대적인 인상을 준다. 그래서 컴퓨터나 기계의 디폴트(default, 초기 환경)로 제공된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의 로고 서체로도 많이 쓰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전 세계에 진출하려면 로고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역적이고 시대적인 색채를 없앤 중립적인 서체를 쓰는 게 그들의 이상을 글로벌하게 펼치는 데 유리하다고 했죠. 그래서 헬베티카체가 미국서 많이 쓰이고 있어요. 뉴욕 지하철에도 전면 적용됐고요."
헬베티카체는 스위스에서 탄생했지만 뉴욕에서 많이 쓰이면서 국제적인 폰트가 됐다. 그는 헬베티카체를 보면 뉴욕 같은 시끄러운 도시에서도 명료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한국의 글자 풍경
그렇다면 한글의 서체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이 글씨 쓰기가 먼저 진행되고 인쇄술이 발명된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을 때 이미 인쇄술이 나와 있었습니다. 한글이야말로 '붓맛'이 아니라 '칼맛'으로 시작한 거죠. 한글은 사대부들은 배척했더라도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생각보다 빨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에겐 문서의 중요성이 떨어지다 보니 한글로 적혀진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요. 오히려 왕실 가족들을 통해 한글 글씨가 발전해 갔는데, 지금도 주로 왕과 왕비들이 쓴 한글 문서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왕비에게는 한글로 편지가 글을 대신 써주는 서사상궁이 있었다. 다섯 살 때 입궁해 엄격하게 글씨 훈련을 한 서사상궁이 남긴 고문서를 보면 성별을 초월하는 진취적이고 호방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렇게 궁에서, 궁녀들에 의해, 궁체가 탄생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들어온 소설의 인기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단했다. 이 시기 궁녀들이 사가로 휴가를 나오면 책방 주인들이 제일 먼저 알고 소설 필사를 의뢰했다. 이로 인해 궁체는 궁 밖으로 나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소설 필사를 위한 글씨체로 흘림체까지 발달하게 됐다. 그렇게 우리 글씨 문화의 경험이 풍부하게 쌓여갔다.
“문자는 권력과 연결됩니다. 글자 역시 남자에 의해 발전돼 왔지만, 한글은 예외적으로 여성에 의해 발전돼 왔습니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한글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에요. 조선시대 의궤 사자관들도 조금씩 한글을 쓰기는 했으나, 대부분 여성들의 글씨밖에 없으니 남자들도 따라 쓸 수밖에 없었죠. 그런 점에서 한글은 세계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20세기 신식 인쇄기술이 들어오면서 글씨체를 바탕으로 폰트가 개발되기 시작한다. 1920년대 신문이 많이 생기면서 지면에 많은 텍스트가 들어가야 하는 신문 환경에 맞는 서체가 개발된다. 글씨가 작아져도 잘 보이면서 전체적으로 덜 답답하게 느껴지는 명조체다. 그는 “서사상궁이 쓰던 궁서체가 우리 신체, 기계와 반응하여 필연적인 모습으로 명조체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미술대학에서 한글 디자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폰트 개발 역시 소프트웨어가 발달하면서 현대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11,172자를 개인이 혼자서도 창조할 수 있게 됐다. 시민 펀딩이 생기면서 연구비가 선 지급되고, 인터넷의 발달로 유통과 홍보가 용이해 지면서 개인 디자이너들이 자기 명예를 걸고 세상에 없던 폰트를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질 높은 다양한 한글 폰트들이 개발되어 외국인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글자는 우리의 시각적인 말투입니다. 표현은 기본적 욕구이니 시대에 맞는 말투가 나타나줘야 글자 생활에 만족을 느끼게 되겠죠? 우리가 항상 궁서체, 명조체 같은 말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예고에 워크숍을 갔는데 그 친구들은 다 배달의 민족체를 쓰더군요. 여고생들이 보기에는 고딕체만으로는 자기들의 발랄함을 표기할 수 없는 거예요. 글자라는 게 정보 커뮤니케이션이기도 하지만 감정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진지할 때는 궁서체, 복고풍의 B급 감성은 배달의 민족체, 명조체는 드러날 듯 말 듯 착실하게 자기 일하는 본문 글자체로 통하는 시대. 바야흐로 폰트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가시성, 판독성, 가독성
“'무슨 폰트를 쓰면 제일 좋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만병통치약 폰트는 없어요. 내가 가시성을 추구하는지, 가독성을 추구하는지, 그것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다 만족하는 것은 없으며, 서로 상충하기도 하니까요."
인간의 눈은 글자를 보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기 좋은 글자와 읽기 편한 글자가 항상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시선을 낚아채는 화려한 폰트는 복장으로 치면 하이힐이다. 잠깐 나를 멋져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뛰어다닐 수 없듯이 폰트 사용도 단어 수준이나 짧은 문장 수준까지만 가능하다.
판독성은 이게 무슨 글자인지 최소 시간에 판별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제일 중요한 게 도로교통 표지판이다. 판결서체는 판결문에만 쓰이는 서체로, '홍'과 '흥'처럼 점 하나에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에 판독성을 엄격하게 높인 폰트다.
“가독성은 가장 어렵고 또 전문적인 분야입니다. 300쪽 짜리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 피로감을 덜 느끼게 하는 건데요. 책을 읽어봐야 알고, 또 뇌와 신체의 작용에 따라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신발에 비교하면 마라톤화인데, 나를 42.195km를 뛰게 만들어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죠. 한 눈에 보면 못 알아보지만 사람들은 느끼죠. 글자는 인간 신체와 반응한다는 점에서 가독성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해요."
그는 커다란 폰트는 취향과 가시성을 따르면 되고, 작은 폰트는 기능성, 가독성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글자도 크기에 따라 작동을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글자는 인간 본연의 마음
기계로 쓰는 활자인 폰트는 응용미술의 디자인의 분야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대량생산하는 설계 원안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쓸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또 백 명, 천 명, 만 명, 백만 명이 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 매커니즘과 함께 발달해 왔다. 그는 이를 두고 “디자인의 역사는 기계에 응답한 아름다움의 역사"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글자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개성과 말투가 사람들의 눈에 보이고 읽힐 때 더 잘 표현되기를 바라죠. 타인과 소통을 다각도로 더 잘하고 싶어 하죠. 더 아름답기 위해서, 더 기능적이기 위해서, 더 다양한 감정을 주고받기 위해서, 우리의 생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타이포그래피를 하죠."
그는 신체가 불편한 사람이나 어린이, 노인을 위한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많다. 지금까지 이들을 위한 타이포그래피는 없었다. 기껏해야 크기를 키우는 정도였을까?
“20~30대 디자이너들이 많은데, 안타깝게도 이들이 노년의 신체변화를 알리가 없죠.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 디자인의 많은 부분이 20~30대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노인들의 자존감은 낮아지고 모멸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죠. 그런 사회는 정서적으로 좋지 못하며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타이포그래피는 나와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우리는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함께 더 잘살기 위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타이포그래피를 한다"고 강조했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저는 이 네 글자가 인쇄술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 읽혀요. 달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고요. 그 생각을 강물이라는 종이에 찍고 스크린에 실어 여러 사람에 전하는 복제화 대량생산, 즉 타이포그래피인 거죠. 달이 강에 비치듯 최대한 아름답고 선명하게 전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또 타이포그래피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요."


서울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독일국제학술교류처의 예술장학생으로 선정되어 독일라이프치히그래픽서적예술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독일 라이프치히는 과거 교통이 발달한 상업도시였으며, 출판의 도시였다. 또한 슈만과 멘델스존, 바흐의 흔적이 살아있는 음악의 도시였다. 출판업자와 편집자가 존경받고, 음악과 문인, 출판인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타이포그래피의 도시였다.
강의가 끝나갈 즈음, 그가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들려주며 바흐의 자필 악보를 스크린 위로 띄웠다. 바흐의 펜이 멈칫했을 자리, 악보가 끝났음을 뜻하는 간소한 그림…. 악보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지만, 바흐의 심경을 보여주는 훌륭한 글자가 됐다.
타이포그래피 역시 마찬가지. 글자를 만들고 배열하는 타이포그래피는 눈으로 소통하고 마음을 연결하는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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