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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외로움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윤희에게
김경태(2019-12-17 10:50:13)



‘윤희(김희애)’는 이혼 후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과 단둘이 살고 있다. 전 남편은 술에 취해 측은한 마음에 선물을 사들고 집 앞에서 윤희를 기다리지만 정작 그녀는 그를 모질게 문전박대한다. 한편, ‘쥰(나카무라 유코)’은 일본의 눈 덮인 오타루에서 고모와 살며 동물병원을 운영한다. 그녀는 윤희에게 아버지의 부고 소식과 그녀를 향한 그리움 담긴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그 편지를 차마 부칠 용기는 없다. 쥰의 책상 위에서 그 편지를 우연히 발견한 고모가 몰래 우체통에 넣으면서 마침내 한국의 윤희에게 당도한다. 한발 앞서 새봄이 먼저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그 안에서 윤희에게 드리워진 오랜 그늘의 근원을 직감한다. 새봄은 윤희를 설득해 오타루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윤희와 쥰은 연인 사이였으나, 동성애를 부정하는 가족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윤희는 부모에게 여자를 사랑한다고 밝힌 후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그 후 그녀는 오빠가 소개한 남자에게 쫓기듯 시집을 갔다. 한편, 쥰은 부모가 이혼을 하자 일본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왔다.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가족들이 그녀의 상처에 공감하며 적극적인 조력자가 된다. 이혼한 전 남편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채감을 갖고서 그녀 주변을 맴돈다. 그래서 그는 재혼 소식을 알리며 미안한 마음에 눈물까지 떨군다. 쥰의 편지를 먼저 읽은 새봄도 엄마의 첫사랑이 여자였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가족들은 그녀의 성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으며 그녀의 사랑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하는 최고의 조력자이다.



남편에게 윤희는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들이 이혼할 때 새봄이 그녀와 살기로 한 건 그녀가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그 규범적 가족 안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이혼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선택을 한 채 딸과 살아간다. 반면에, 쥰은 윤희와 달리 이성과의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동성과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며 그럴 의지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그 어느 세계도 선택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방에서 첫사랑의 꿈을 꾸며 차마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그녀는 커밍아웃에 회의적이다. 차별받지 않기 위해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았다고 고백하며, 자신을 흠모하는 료코에게 자기처럼 비밀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차마 발설할 수 없는 동성애는 그렇게 은유 안에 머물며, 쥰은 동성애적 욕망과 료코를 동시에 밀어낸다. 윤희와 쥰의 레즈비언 정체성은 이혼을 하거나 비혼으로 머무는 것과 같이 소극적으로 수행되며, 그들의 동성애적 욕망은 금욕적 외로움이라는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드디어 윤희와 쥰은 재회한다. 그 조우는 짧고 담담하게 묘사된다. 그들은 부둥켜안거나 목 놓아 울지 않는다. 그저 나란히 서서 별말 없이 걸을 뿐이다. 새봄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고 서로의 곁에 그 관계를 방해하는 가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함께 미래를 도모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은 오롯이 여고시절/과거에 종속되거나 봉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에 그 만남의 지향점은 그들의 재결합이 될 수 없다.



그 여행은 윤희를 둘러싼 외로움의 기원을 찾는 여정이었다. 새봄이 주목한 것은 윤희가 숨겨온 성 정체성이 아니라 그로 인해 그녀에게 깊이 각인된 외로움의 그늘이다. 따라서 그 재회의 효과는 불가피하게 헤어진 동성 연인이 마침내 함께 사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그 오랜 그늘을 걷어내는 층위까지로 한정된다. 즉, 실패한 과거를 현재에 성공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충분히 애도된 과거의 사랑은 딸과 함께 미래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충만한 의지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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