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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김지영을 이해하기 위하여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이휘현(2019-12-17 11:59:37)



내 대학시절의 독서 이력을 회고해 보면, 한쪽 귀퉁이에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자그마하게 자리하고 있다. 무슨 대단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페미니즘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문학 사회학 등등을 두루두루 훑다 보니 어느 순간 여성주의라는 것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갔던 것이다. 거기엔 순정한 지식에의 욕구 못지않게 순정치 못한 과시욕도 한몫했던 것 같다.
여하튼 덕분에 베티 프리단부터 글로리아 스타이넘까지, 그리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존 스튜어트 밀까지 나는 두루두루 페미니즘의 역사와 사상을 겉핥기식으로나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즈음 각 시대와 공간을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여덟 명의 삶을 정리한 책을 한 권 펴냈는데, 거기에 나도 공저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대표저자로 책 표지에 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2001년 여름에 출간된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이 바로 그것이다.
출간 당시 이 책은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았다. 지금에 비하면 페미니즘을 다룬 책 혹은 콘텐츠가 턱없이 적었던 시절 덕(?)도 좀 보았고, ‘남성의 광기를 잠재운 여성들’이라는 도발적인 책 제목이 꽤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여러 신문 서평란에 자그마하게나마 소개글이 실리고, 모 방송국의 책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저자와의 대화라는 명목으로 한 시간 동안 내 목소리가 전국에 전파를 타기도 했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타이틀로 모 잡지에 인터뷰와 사진까지 실리는 호사를 누렸다. 모 지역일간지에는 ‘페미니스트의 창’이라는 칼럼난에 1년 반 동안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체득한 페미니즘이란 삶이 아니라 머리로 받아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의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라 당위와 의무로 똘똘 뭉친 ‘짱구 페미니스트’의 허세. 그래도 염치라는 게 있어 결혼 후에는 집에서 뻔뻔한 가부장으로 전락하지 않으려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기는 하는데, 그게 또 워낙 어설프니 내 스스로에게도 면목이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가끔 면피용으로 여성의 삶을 다룬 혹은 여성주의를 표방한 책들을 구입해 읽는다. 부끄럽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1년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건 앞에 서술한 나와 페미니즘의 역학관계가 낳은 독서 행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책이 제법 인기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지 백만 부 넘게 팔렸다는 사실도 몰랐고, 이 책으로 인해 페미니즘을 둘러싼 격한 논쟁이 오갔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제목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도 촉이 발동해 이 소설이 여성의 삶을 전면에 내세웠겠구나 정도는 짐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전정보 없이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지면에 이 소설에 관한 개인적 감상을 간단하게나마 적어볼 순 있을 것 같다. 이 텍스트를 둘러싼 호오의 전선이 워낙 살벌해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어느 진영에서건 호되게 질타당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나는 그냥 독자로서의 내 순정한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우선 이 소설을 읽고 나서의 내 첫 느낌을 말해보자면, 그 감상평이란 당혹스러움으로 갈무리될 것 같다.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온 독자로서의 내 판단은 이 책의 문학적 가치에 그리 큰 점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술술 읽힌다는 좋은 가독성을 빼면, 이야기의 구조나 그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지나치게 투박하다고 느껴졌다.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야기의 중간에 삽입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또한 매우 진부하거나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 이 정도 수준의 소설이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 거지?’
그런데 그 불편한 마음은 책을 읽은 이후 곧 텍스트 밖으로 튀어나와 엉뚱한 지점에서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혹여 내가 남자라서 가지고 있는 본능적 거부감이 표출된 것일까? 결국 알량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짱구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마저 이제 훌훌 벗어 던져버린 것일까? <82년생 김지영>을 바라보는 내 불편한 심기가 결국 내 안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 있던 남성우월주의를 폭로해준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함 말이다.
그 후, 행여 누구에게라도 들킬까 봐 내 마음속 금기어로 ‘82년생 김지영’을 새겨두었는데, 이번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하면서 그간 이 소설이 뭇 남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질타 혹은 저주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전 인터넷과 SNS는 후끈 달아올랐고, 극장 개봉 직후 영화도 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소위 평점 테러라는 것이 벌어졌던 것이다. 영화비평을 하는 한 유명 유튜버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다룬 자신의 10여 분짜리 영상에서 ‘꼴페미’라는 말을 열 번도 넘게 사용했다(유튜브 영상을 끝까지 보면 소설에 대한 약간의 반감과는 달리 영화에 대한 평은 호의적이었다).
어쨌거나 영화는 평점테러를 정면 돌파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는데, 나도 영화개봉 직후 극장에 가서 이 작품을 보았다. 영화의 느낌은 소설을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소설이 가진 문제의식을 품고 가되 그 결을 순화시키고, 지나치게 흑백논리로 이끌어 가던 정서를 영화는 공감의 분위기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몇몇 캐릭터의 전형성이 눈에 띄었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관객들에게 ‘이 시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여러 가지 의미를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사랑받을 만했다.
다만 극장문을 나서면서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영화의 원작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다시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영화에서 받은 좋은 감정을 나는 왜 원작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한 것일까. 그 고민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내용에 대한 흐릿한 기억과 함께 자꾸만 나를 혼돈 속으로 몰아갔다. 그렇다고 다시 이 책을 펴들 엄두는 나지 않았다. 행여 1년 전 받았던 내 느낌에 두 번째 독서가 확인사살처럼 또 한 번 좋지 못한 감정을 심어준다면 큰 낭패 아닌가.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 이 소설이 가진 문학적 가치는 논외로 하고 우선 ‘정치적 가치’를 눈여겨보기로.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관점이 전적으로 옳다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복잡한 고민을 이 소설이 젠더 감수성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툭 던져준다는 사실은 인정하자고. 여성 권익 향상이 상투적인 구호처럼 남발되는 지금, 여전히 억압받는 자로서의 삶을 강요받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그곳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여성들의 자리를 외면하지 말자고. 그리하여 김지영으로 명명된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의 삶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자고._이휘현 KBS전주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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