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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②
풍요 속에 감춰진 차별과 격차의 민낯과 마주하다
임안자(2020-02-10 16:30:29)




미국으로 가다
1966년 친구가 독일로 떠난 다음 나도 두 달 뒤에 미국으로 떠났다. 평소 에네스트 헤밍웨이, 존 타인백, 제임스 볼딘 등 미국 작가들의 책을 아주 좋아했었지만 미국으로 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으로 갔던 건 예수병원의 내부 사정과 무관하지 않았다. 전주 예수병원은 미국 버지니아주의 프레스비테리안(장로교) 선교단체가 세운 것으로서 원장을 비롯한 병원의 윗자리는 선교사 출신의 의사나 간호사들이 맡았었다. 간호학교의 교장 마그리트 프리차드 역시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선교사 출신으로 간호학교의 영문교재나 병원에서의 실습 등 3년간의 교육과정은 거의 미국 간호학교의 수준에 맞춰져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선교사들이 이끄는 간호학교는 영어를 익히는 데 더없이 좋은 곳이었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영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자극제가 됐었다. 그리고 졸업하고 3년 뒤 예수병원의 지하실에 설치된 3등 환자 병동의 수간호원이 되면서 하일리 간호원장과 가까워졌다. 하일리는 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구들이 들어오면 간호사들에게 먼저 기재들의 사용법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그때마다 통역을 나에게 맡겼다. 한국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았던 30대의 간호원장은 가끔 시간이 나면 나와 영화관에도 들리고 때로는 나를 그의 집으로 불러 차를 마시는 등 사적으로도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 우리는 차츰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그러던 참에 예수병원 수술실의 마취과 책임자로부터 갑자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루는 그가 나를 수술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하일리의 추천을 받고 나를 불렀다며 예수병원에 마취 전공의 전문인이 필요한데 그에 대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을 간추리면 예수병원에서 1년간 그의 개인지도를 받은 다음 버지니아 대학에서 마취를 전공하고 마취사 자격증을 받으면 예수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그한테서 마취과를 이어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유학 조건에 대해선 병원원장과 이미 합의를 봤으며 그에 필요한 경비는 버지니아 선교재단에서 모두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가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 생각을 물었는데 솔직히 나는 너무 갑작스럽게 주어진 행운(?)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찜찜하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대답으로 자리를 떴다. 그런 뒤 나는 며칠을 갈까 말까를 놓고 심한 혼란 속에서 보냈다. 한편으로는 이왕 간호사로 계속 일할 바에야 한 분야의 전문가 자격을 갖추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다가, 또 과연 내가 저들이 바라는 대로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유학 쪽을 택했다. 당장 내 앞날을 위한 어떤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모처럼 주워진 유학의 기회를 그냥 내팽개치는 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수술실로 옮겨 선교사의 개인교육을 받으며 1년을 보내는 동안 미국에 가기 위해 미국대사관의 영어시험을 치르고 여권을 챙기는 등 여행 준비를 했다. 그런 와중에 뜻밖에 미국 유학이 취소됐다는 소식이 왔다. 선교사는 나를 만나자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주기로 약속된 장학금이 어느 아프리카의 학생에게 넘어갔는데,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더 가난해서 새로이 결정된 것”이라며 막 도착한 편지를 나에게 건네줬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게 어쩌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날이 갈수록 허탈감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수병원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이미 한국을 떠나버린 상태여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한 달이 지날 무렵에 시카고 쿡 카운티 병원에서 막 귀국하여 간호학교의 새 강사로 들어온 선배 언니가 내 사정을 듣고는 시카고 쿡 카운티 병원에 추천을 할 테니 그리 가라고 권했다. 나도 그게 낫다 싶어서 선배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돼서 쿡 카운티 병원으로부터 교환간호사의 초청을 받고는 훌쩍 한국을 떠났다.


시카고의 쿡 카운티 종합병원
1966년 5월 말에 나는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어머니를 김포공항에 홀로 남기고 시카고로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에 어마어마한 쿡 카운티 병원의 6층에 있는 외과병동에 배치됐다. 시카고의 서북쪽에 자리한 쿡 카운티 병원은 1857년에 세워진 오래된 건물로서 애초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료를 제공하는 곳이었고 나중에는 의대생과 의사들의 교육센터로도 쓰였다. 그러다가 1916년에 새로이 증축되어 3천 명의 환자를 수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커졌다. 하지만 1910~1920년 사이 백인들이 정착해 있는 구역에 남부지역에 할당되었던 흑인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흑·백인들 사이에 갈수록 충돌이 잦아졌고 그 때문에 60년대부터 대부분의 백인들이 시외로 빠져나감으로써 ‘백인탈출’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쿡 카운티 병원은 미국 최초의 흑인병원이 됐는데, 규모만 컸을 뿐 부실경영으로 내리막길에 다다랐다. 그러다 60년대 끝에 가서 시카고 시의회의 새로운 정책으로 많아 나아졌다고 하지만 내가 쿡 카운티 병원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내부 구조나 환자의 수용능력 또는 의료기술의 수준면에서 여러모로 아주 허술했었다. 예를 들어 내가 근무하던 외과병동만 하더라도 남녀로 나눠진 병실 두 개는 각각 열다섯 명이 넘는 환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었고, 남자병실은 문도 없이 복도로 훤히 노출되어 환자들의 사적인 공간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심한 중병환자들마저 병실이 모자라 방 하나에 두세 명이 들었을 만큼 치료의 수준도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내가 일하는 외과병동에 배치된 간호사나 의사들은 모두 백인이었고 간호사조수 둘만 흑인이었다. 의사들은 미국, 이란, 체코, 한국, 일본 출신이었고 간호사들은 보스턴에서 온 수간호사 말고는 모두 시카고의 간호학교 졸업생들로 외국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미국 의사들 중에 한 젊은 인턴은 곧 베트남 전쟁터로 가야 할 처지였는데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한국에 대해 많이 물었고 그때마다 베트남 전쟁터에 가는 게 너무 끔찍하고 두렵다며 괴로워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쯤에 하루는 체코 출신 의사가 아주 신중히 나에게 언제 시간이 있으면 밖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는데, 데이트에 나를 초청한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감각이 많이 늦은 탓도 있었지만,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았던지라 느닷없는 그의 물음에 솔직히 얼떨떨했다. 30대 초의 그는 금발에다 파란 눈 그리고 밝은 성격이어서 누가 봐도 여인들에게 인기가 높을 것 같았는데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게 처음엔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데이트 요청이 그치지 않는 걸 보고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런데도 내 마음은 준비가 돼 있지 않았었다. 미국에 온 지가 짧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범죄율이 제일 높은 깡패의 도시 시카고에서 누구를 사랑하고 가정을 이룰만한 용기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문화의 충격에서 오는 부작용이었든 아니면 내 정서적 미숙함이었든 나는 그를 사귈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내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그는 조금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외국 생활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는데, 그의 따듯한 말에 나는 언뜻 참 좋은 사람인데 내가 바보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쿡 카운티 병원에 들어온 지 반년이 지나자 야간근무 차례가 돌아왔다. 간호사는 나 혼자였고 50대의 흑인 조수 둘이 나를 도왔는데 그들의 슬랭을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으나 다행히 둘 다 일에 익숙하고 협조를 잘해줘 손이 잘 맞았다. 그럼에도 셋이서 중환자를 포함한 40여 명의 환자들을 제대로 돌보기엔 어림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반년 지나 내 체중이 7킬로가 줄었을 정도였다. 사실 8시간 야간근무에 3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지만 그건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게다가 하루 걸러 이동외과 팀이 복도에서 응급환자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병동 주위가 어수선산란했고, 응급환자의 90%는 칼에 찍히거나 총을 맞았는데 그중에는 알코올 중독자들도 많았다. 아무튼 응급환자, 입원환자 가릴 것 없이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빈민층 흑인들이 겪는 지독한 가난과 사회적 격리로 인한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대부분 실업자였던 그들은 고정된 거처도 없는 데다 찾아오는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들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아주 드물었다. 그 시기에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아주 풍요로운 나라로 밖에 알려져 있었지만, 내가 쿡 카운티 병원에서 간호했던 환자들의 삶은 너무 비참하고 절망적으로 비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쿡 카운티 병원에서 내가 특별히 배운 것은 없었다. 예수병원에서 쌓은 지식이나 경험으로 충분했고 한국에서 배운 영어도 슬랭을 빼놓고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외국인이기 때문에 나보다 경력이 훨씬 짧은 미국인 간호사들의 월급이 내 것보다 100달러가 높다는 데 놀랐다. 그 시절에 100달러는 오늘에 비해 네 배 정도 높았기에 어림잡아 400백 달러를 덜 받은 셈으로 나에겐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쿡 카운티 병원은 나를 학생이 아닌 교환간호사로 초청했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 간호사와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것으로 믿었는데 월급의 차별 대우와 맞닥뜨리는 순간 쿡 카운티 병원에서 왜 그처럼 나를 빨리 초청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론 교환간호사가 뭘 뜻하는 지도 모르고 미국에 온 나에게도 책임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왕에 손해를 볼 바에야 알고나 보자는 생각에서 사무국을 찾아가 월급의 차이에 대해 직접 물어봤다. 사무실의 여직원은 “위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런데 당신은 고용조건에 대해 미리 다 알고 오지 않았느냐“며 오히려 반문을 하면서 힐끔 나를 쳐다봤다. 그날 내 질문은 그렇게 끝났지만 몇 년 뒤 스위스에서 살면서 우연히 읽은 신문기사를 통해 내가 쿡 카운티 병원 사무국에 던졌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찾았다. 신문기사에 따르자면 내가 겪었던 월급 차이의 문제점은 시쳇말로 브레인 드레인(인재의 국외수출)에 속한 것으로, ”2차대전 이후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개발도상에 속하는 나라의 전문인들을 낮은 월급으로 초청하여 자국의 고용주들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일종의 착취의 체계로, 이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통계에 따르면 브레인 드레인의 대상자 중에는 전문기술자, 의사, 간호사가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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