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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⑤
시카고의 한인사회
임안자(2020-05-12 19:27:44)

시카고의 한인사회
임안자 영화평론가


내가 시카고에 살 때만도 한인사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은 하나뿐이었던 한국 음식점과 두어 개 정도의 한인교회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시카고에 온 뒤 나는 첫 3개월 동안 한국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거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데다 혼자 음식점을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쿡 카운티 병원에서 알고 지내던 한국간호사가 나더러 저녁에 애들을 봐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간호사와 그녀의 이북 출신 의사 남편은 고정된 일자리 말고도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다른 병원에서 이중 작업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약속한 날에 그들의 아파트로 들어가자 코에 익은 한식 특유의 구수하고 칼칼한 냄새가 먼저 나를 환영했다. 넓지 않은 아파트였는데 두 애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간호사 부부는 나더러 식탁 위에 음식이 준비됐으니 많이 먹으라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식탁 위에는 푸짐한 한국 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고기를 싫어해서 채식만 했었지만 그런 걸 가릴 틈도 없이 차려놓은 음식을 모두 다 먹어치웠다. 그때의 그 기분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외국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라면 그때의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리라. 나는 그날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그 뒤에도 간호사의 애들을 가끔 돌봐주는 대가로 그녀가 만든 한국 음식 대접을 받았다. 그 중에 이북식의 비지찌개는 단연 일품요리였다. 물론 그 뒤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한국 음식점에도 갔고 2년째부터는 기숙사의 부엌에서 직접 요리를 할 수 있어 음식에 대한 갈증은 저절로 풀렸다.

나는 종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유교적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는 불교신자인 어머니를 따라 마이산의 절에 자주 다녔다.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던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용담에서 마이산까지 여섯 시간이 넘는 거리를 발로 걸어서 가느라 너무 힘들었지만 중간중간의 쉼터에서 어머니가 준비한 맛있는 떡이나 부침개를 먹는 재미로, 그리고 또 마이산 절 안의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마루의 구석에 앉아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친구한테서 빌려보는 아동문학책에 푹 빠질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가 좋아서 싫다 하지 않고 어머니를 따라가곤 했다. 그리고 국민학교 시절에는 동네 친구들을 따라서 일요일에 교회를 들랑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전주 간호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가면서 3년간 정식으로 성경을 배웠으나 스스로 기독교 신자로 여길 만큼 믿음이 깊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시카고에 온 지 반년쯤에 대구에서 온 간호사와 가까워지면서 어느 장로교회의 일요일 예배에 자주 다녔다. 교회에 가면 평소 보지 못했던 한국 사람들과 모국어로 이국생활의 좋고 나쁨에 대해 대화를 하고 궁금했던 고국의 소식도 들을 수 있어 향수를 달래는 데 약이 됐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항상 한국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그러나 몇 달 다니다가 교회와 멀어졌다. 그런 데는 일부 교인들의 종파적인 태도도 마음에 거슬렸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목사한테서 잔혹함을 느끼면서부터였다.

어느 일요일에 으레 그랬듯이 나는 예배를 마치고 대구 친구와 함께 목사의 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은 목사는 처음엔 듣고만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그건 안 돼요, 못 합니다”를 연거푸 내뱉다가 전화를 끊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럼에도 저쪽에서는 계속 “도와주세요”를 외치는 남자의 처절한 울음이 우리의 귀에까지 들려왔으나 목사는 전화를 끊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커피를 돌리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런 뒤 일주일이 지나서 나는 어느 교인으로부터 전화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듣고는 망연자실했다. 전화에서 울던 남자는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다 파독 간호사와 함께 미국에 불법으로 들어와 숨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자 불법체류 문제에 걸릴까 봐 집에서 혼자 낙태를 시도하던 중 심한 출혈로 죽었다. 남자는 불쌍히 죽은 여인의 영혼을 위해 한 번만이라도 기도해 달라고 목사에게 애걸했으나 거절을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다시는 그 목사의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나는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읽으면서 언뜻 내가 다니던 시카고의 옛 교회가 떠올랐다. 그때 시카고의 한인교회에서 내가 경험했던 여러 형태의 희비극이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데서 어떤 서글픔을 느꼈다.



시카고는 미국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적인 폭력배 알 카포네(1899~1947)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폭력과 부패의 역사가 길다. 그만큼 시카고는 일반적으로 불안정하고 두려운 도시로 쿡 카운티 병원의 첫날 교환간호사들을 위해 마련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경찰이 한 말도 “시카고는 살인범이 많다. 외출할 때 가방을 조심하라. 모르는 곳은 혼자 가지 말고 문제가 생기면 빨리 경찰에 보고하라”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주눅이 들 정도로 신변의 안전을 강조했다.

어찌 됐든 시카고는 나의 첫 외국 생활의 도시로 처음 몇 달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내 말, 내 음식, 내 나라의 문화가 그리워서 기숙사의 방에서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향수병도 차츰 사라지고 대신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즐기고 또 고민하면서 3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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