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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 | 연재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
역병 종식을 신께 감사드리다
프라하와 비엔나의 페스트조일레
윤지용(2020-05-12 19:31:08)

윤지용의 두 도시 이야기 | 프라하와 비엔나의 페스트조일레

역병 종식을 신께 감사드리다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와 함께 중부유럽을 대표하는 역사도시로 꼽힌다. 이 두 도시는 지난날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는 공통점이 있고, 두 도시 모두 18세기에 세워진 페스트 종식 기념비 ‘페스트조일레(Pestsäule)’가 있다.   


오랜 비운의 역사를 품은 도시 프라하
우리에게 생소했던 도시 프라하는 2000년대 초반에 어느 TV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후 낭만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어렸을 때 반공교육 열심히 받았던 나에게는 여전히 공산당 독재와 소련의 침공에 항거했던 ‘프라하의 봄’으로 더 익숙했다. 그래서 프라하 여행의 첫날 도심의 바츨라프 광장에 있는 작은 비석을 찾아 나섰다.
체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이자 수호성인인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있는 광장 한쪽에 작은 추모비가 있다. 1968년의 시민봉기 당시에 프라하에 진주한 소련군의 탱크에 맞서 분신으로 항거했던 두 젊은이 얀 팔라흐(Jan Palach) 와 얀 자이츠(Jan ZajÍc)를 기리는 비석이다. 이 광장에서 1969년 1월 얀 팔라흐가 분신했고 한 달 후에 얀 자이츠가 그 뒤를 이었다. 얀 팔라흐는 만 스무 살이었고 얀 자이츠는 만 열여덟이었다. 살았으면 칠십 대 노인이 되었을 그들은 여전히 ‘청년’으로 남아 있다. 마치 우리의 ‘유관순 누나’처럼. 추모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초라했지만, 프라하 시민들이 정성스레 가져다 놓은 꽃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체코는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독립했지만, 얼마 못 가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다. 당시에 나치 점령군에 항거하다가 산화한 젊은 레지스탕스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새벽의 7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공산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던 시민봉기 ‘프라하의 봄’은 소련군의 침공으로 7개월 만에 참혹하게 진압되었다.

프라하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필수 코스는 구시가지 광장과 카를교, 그리고 블타바강 너머 언덕 위의 프라하성이다. 구시가지 광장은 11세기 무렵부터 번성한 프라하의 옛 도심답게 중세풍의 오래된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다. 이 광장에 있는 천문시계는 1410년에 만들어졌다는데, 시간뿐만 아니라 해와 달의 위치와 절기를 알려준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었던 것처럼 백성들의 농사를 돕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매시 정각마다 시계 안에서 예수의 12사도 인형이 나와서 행진한다. 이 모습을 찍기 위해 많은 여행자들이 휴대전화나 카메라를 들고 천문시계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프라하성으로 가려면 프라하를 동서로 나누는 카를교를 건너야 한다. 프라하의 상징인 카를교는 블타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15세기 초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4세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니 6백 년이 넘었다. 이 고풍스러운 돌다리의 난간에는 수십 개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얀 네포무스키 성인의 조각상이다. 카를 4세가 신임하는 가톨릭 사제였던 얀 네포무스키는 고해성사를 통해 알게 된 왕비의 비밀을 말해달라는 황제의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이 다리에서 처형되어 강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블타바강의 서쪽 언덕 위에 있는 프라하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거쳐했던 성인데, 현재 체코공화국의 대통령궁도 이곳에 있다. 사실 프라하성은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라 궁전과 성당 등 여러 개의 건축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역사지구’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성당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대가로 꼽히는 알폰소 무하(Alfons Mucha)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프라하성 뒤쪽의 골목길인 ‘황금소로(Golden Lane)’는 본래 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가 있던 곳인데, 16세기부터 연금술사들과 귀금속세공기술자들이 모여 살면서 황금소로라고 불리게 됐다. 이 골목길의 22번지에는 소설 <변신>의 작가인 프란츠 카프가가 머물렀던 작업실 있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소재가 바로 이곳 프라하성이었다.

프라하성 안에 있는 대통령궁의 정문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자였던 게르만인이 피지배층인 슬라브인들을 짓밟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위압적인 조형물이 있다. 체코 민중들의 저항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을 상징하는 조형물인데 철거하지 않고 대통령궁의 정문 장식물로 그대로 두는 것이 약간 의아했다. 아픈 과거사도 그것대로 기억하자는 뜻일까?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화가 깃든 도시 비엔나
지금은 작은 나라가 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을 배출하고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점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던 나라는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일대를 석권하고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침략을 막아낸 대제국이었다. 헝가리, 체코 등도 이 제국의 일부였다. 왕년의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어 연합국들의 신탁통치를 겪은 후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곳곳에 옛 제국의 영화가 깃들어 있는 도시다. 영어로는 비엔나(Vienna)지만, 오스트리아의 공용어인 독일어로는 빈(Wien)이다. 비엔나는 15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들어서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유럽의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슈베르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 당대의 음악가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했다. 역사문화유적으로는 고딕 양식의 백미로 꼽히는 성 슈테판 성당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쇤부른 궁전, 지금은 세계적인 미술관이 된 벨베데레 궁전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라서 그런지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ZE),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여러 국제기구들의 본부도 비엔나에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는 성 슈테판 성당은 구시가지의 상징이다. 137m 높이의 첨탑과 25만 개의 화려한 벽돌로 만든 모자이크 지붕이 압권이다. 본래 12세기 중반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고 있었는데 나중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고딕 양식으로 개축했고 한다. 이 성당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대 황제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모두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규모와 화려함이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맞먹는다는 쇤부른 궁전에는 무려 1,440개에 달한다는 방들과 화려한 정원이 있다. 당대를 호령했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방은 보석으로 장식된 내부가 화려하기로 유명하다. 역시 궁전이었던 벨베데레 미술관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전시하고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역시 클림트의 ‘키스’다. 미술관 매점에서는 이 작품을 응용한 다양한 기념품들을 판다.

비엔나는 1995년에 만들어져 9년마다 후속작이 나온 멜로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무대이기도 하다. 유럽횡단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두 주인공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는 함께 비엔나에 내려 단 하루 동안 기약 없는 사랑을 나눈다. 이 두 남녀가 첫 키스를 나누었던 대형 회전관람차가 있는 놀이공원이 프라터 공원이다. 비엔나를 찾는 많은 연인들이 이 공원의 회전관람차를 타고 영화 주인공들을 흉내 내기도 한다.

비엔나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가 전래된 곳이기도 하다. 커피는 원산지인 이디오피아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오스만투르크에 전해졌다. 신성로마제국과 패권을 겨루던 오스만투르크가 비엔나를 침공했다가 두고 간 ‘카흐베’가 유럽에서 ‘카페’로 발음되다가 영어로 ‘커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무렵에 연인들이 즐겨 마셨던 ‘비엔나커피’는 본래 ‘아인슈페너(einspanner)’라는 이름의 비엔나식 커피다. 아인슈페너는 ‘마차를 끄는 마부’라는 뜻인데, 비엔나 시내에서 마차를 끌던 마부들이 피로를 풀기 위해 달짝지근한 크림을 섞은 커피를 마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 참사와 ‘페스트조일레’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전역에 페스트라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사망한 대재앙이었다. 사망한 시신이 까맣게 변한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하는 페스트는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발생해서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에 상륙했다고 한다. 남부유럽의 발칸반도에서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온 유럽을 휩쓸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소도시에서 이 전염병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소재로 했다.

비엔나의 중심가인 그라벤 거리에는 ‘페스트조일레(Pestsäule)’라는 조형물이 있다. 1679년부터 오스트리아 일대에 창궐했던 페스트 전염병이 4년 만에 물러간 것을 기리기 위해 1683년부터 10년 동안의 공사 끝에 세워진 기념비다. 당시에 페스트로 인해 비엔나 인구의 절반가량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조일레(säule)는 독일어로 ‘기둥’, 영어의 pillar나 column에 해당한다. 황금으로 치장된 이 기념비의 윗부분에는 천사들이 성삼위일체를 호위하고 있고 아래쪽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드 1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형상이다. 성삼위일체를 찬미하는 기념비라고 해서 영어로는 ‘성삼위일체 기둥(Column of the Holy Trinity)’이라고도 한다.



프라하의 페스트조일레는 프라하성에서 언덕을 내려오다가 말라스트라나 지구의 성 니콜라스 성당 근처에 있다. 1715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비엔나의 것보다 규모나 화려함이 덜하기는 하지만,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게 가호를 베풀어준 신에 대한 찬미와 다시 그런 참사를 겪지 않게 해달라는 간절한 염원이 느껴진다. 체코 모라비아 지역의 올로무츠에도 이런 페스트조일레가 있다는데, 규모나 아름다움이 프라하의 것을 능가한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은 의학지식과 방역체계가 없던 그 시절에는 곳곳에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고 신에게 간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250만 명이 넘게 감염되었고 18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하나하나가 생명인데 수만, 수십만이라는 무심한 숫자로 익숙해져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재앙이라고들 한다. 하루빨리 이 비극을 딛고 다시 평화를 되찾은 후에,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인류애와 연대의 힘을 기리는 ‘코로나조일레’를 세우자.                                 

윤지용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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