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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 | 연재 [이휘현의 책이야기]
우상파괴자는 어떻게 우상이 되었는가
이처릉 <불평등의 세대>
이휘현(2020-10-08 18:29:29)


우상파괴자는 어떻게 우상이 되었는가
글 이휘현 KBS전주 PD



지은이 이철승
출판사 문학과지성


오랜 세월 수많은 인간들이 평등을 꿈꿔왔다. 물론 그 꿈을 막는 자들도 적잖았다. 평등 혹은 평등에의 갈구를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냉소가 평등하고자 하는 열망에 찬물을 끼얹고는 했다.


안타깝게도 인류는 완벽하게 평등을 성취한 시공간을 맛보지 못했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완전한 평등은 이상향일 뿐 현실에는 없다. 그렇게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은 인류에게 또 하나의 억압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개인’이라는 근대의 성취가 평등이라는 가면을 쓴 ‘전체’ 아래 무참히 짓밟히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순결한 평등이란 없다. 그저 좀 더 평등해지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 행여 그 발걸음마저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의연히 맞설 필요는 있다. 그것을 모순 혁파나 부조리 타파 혹은 우상 파괴라 말해도 좋고, 또는 반항하는 인간이라 통칭해도 좋을 것이다.


‘386세대’는 대한민국 수립 이래 시대의 모순에 가장 치열하게 맞서 싸웠던 집단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들은 암울했던 1980년대를 온몸으로 갈아 전진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뜨거운 시절은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들 세대는 ‘반항하는 인간’에 가장 근접하며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뿌리내린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대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386세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그들은 기성세대가 되었다. 아니 이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확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자유와 평등을 소리높이 외치며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그들이 주류가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 사회는 유사 이래 가장 평등한 세상을 구가하고 있을까?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철승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그는 지금 이 시대가 과거 여느 때 못지않은 불평등의 구조 속에 노출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 불평등이 극심하게 고착화되어 간다고 진단한다. 평등을 꿈꾸었던 자들이 불평등의 성채를 견고하게 쌓아가는 이 시대의 부조리함. 이철승 교수는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현 한국 사회 속 386세대를 일컬어 ‘불평등의 세대’라 적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386세대가 권력을 잡고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쩌면 더욱 심화된 ‘불평등 구조’를 가진 사회가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은 신분화되어 사회적 낙인이 찍히고 있다. …(중략)… 청년 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닌, 계층 고착화의 기제로 바뀌고 있다.”(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16쪽)


수많은 지성들이 불평등을 논할 때 그 근간으로 삼는 것은 ‘계급’이다. 하지만 이철승은 계급 대신 ‘세대’를 꺼내 들었다. 즉 ‘세대의 정치’를 이해해야만 현 한국 사회가 처한 불평등 구조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 ‘세대의 정치’는 한반도 벼농사 중심의 농경사회 그리고 유교 문화 속에서 긴 시간 자생해 온 ‘한국형 위계 구조’의 진화와 맞물리며 힘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나보다 어린놈들은 다 무릎 꿇어!!”라는, ‘나이’에 기반한 조직 내외부의 ‘연공 구조’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급부상한 ‘386세대의 정치’와 맞물려 거대 권력화 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80년대는 사실 경제적으로 보면 취업시장이 활짝 열려있던 시기였다. 노동운동의 조직화로 고질적인 저임금 구조가 해소되어 임금노동자들의 지위가 향상되는 시절이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전까지 주류로 군림해오던 ‘산업화 세대(1930년대-1940년대 출생)’를 손쉽게 퇴출시켰고 그 자리를 386세대가 꿰찼다. 199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IT 열풍’에 적극적으로 올라탄 이들도 386세대다. 포스트 386세대로 불리는 70년대생 90년대 학번은 IMF로 인해 취업문이 봉쇄되면서 IT 열풍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


위아래로 적수가 없어진 386세대는 2000년대 이후 정치, 사회, 시민운동의 요직을 점령하며 선취하고 있던 경제권력과 함께 양날의 검을 쥔 채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섰다. 아스팔트 위에서의 뜨거웠던 연대의 기억은 이제 각종 권력의 합종연횡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민주주의와 세계화의 주역 386세대는 그렇게 권좌의 자리에 오른 후 오늘날까지도 견고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그런데 권력이 한 곳에 오래 집중되면 희생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 희생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청년’과 ‘여성’을 목도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외환위기가 강요한 노동시장 유연화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청년세대의 빈곤은 나날이 높아간다. 한국형 위계 구조 속에서 끝없이 희생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의 지위는 여전히 큰 개선이 없다. 이 희생자를 짓밟고 선 것은 다름 아닌 386세대의 권력 중독이라는 것이 이철승 교수의 분석인 셈이다.


“민주화와 세계화(시장 개방. 정보화. 금융화)는 한국 사회의 더 많은 소통, 더 많은 자유, 더 공정하고 평등한 분배 구조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건만, 도대체 왜 우리는 더 격화된 입시 경쟁과 취업 경쟁, 더 심화되고 고착화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가?”(16쪽)


이철승 교수는 ‘사회적 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의 처방전을 꺼내 들었다. 시장의 가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삼되 국가의 개입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다소 추상적이고 구태의연한 느낌마저 든다. 20여 년 전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차라리 그의 두 번째 처방전이 가슴에 와닿는다. 세대 간 연대 전략으로서 ‘386세대의 2차 희생’!!


경제, 사회, 정치 등을 독점해 과두 사회를 형성한 386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권력을 다음 세대와 과감히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다. 연대의 개념을 ‘세대 내’ 네트워크가 아니라 ‘세대 간’ 네트워크로 바꿔야 한다는 그의 처방전은 역시나 구태의연한 느낌이지만, 그만큼 또 절박한 것이기도 하다.


우상파괴자는 어느새 우상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다시 망치를 들고 스스로의 우상을 깨부술 수 있을 것인가. 386세대는 다시 한번 시대의 부름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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