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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 연재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②]
문제적 인간의 탄생
분신(分身)
이휘현(2020-12-03 11:36:59)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②


문제적 인간의 탄생 : 분신(分身)
이휘현 KBS전주 PD


“이 소설은 완전히 실패작이었다”
“당신의 재능을 소중히 하며, 그것에 충실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될 겁니다.”
작가로 성공하길 고대했던 젊은이가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가슴이 얼마나 뛰겠는가. 그것도 당대 주류 문단의 대장 격인 사람이 바로 코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면 말이다.
1845년 봄, 뻬쩨르부르그에서 이제 막 첫 소설을 선보였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황홀한 체험을 절대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벨린스끼는 문학을 꿈꾸는 러시아 청년들에게는 하나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었고 또한 뛰어난 평론가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초면인 나를 천재로 추켜세우다니….’ 벨린스끼의 집을 나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슴은 한없이 벅차올랐다. 그로부터 32년 후인 1877년, 도스또예프스끼는 <작가 일기>에 그날의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나의 삶에 찾아왔다는 것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었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러시아 문단의 뜨거운 반응은 이 가난한 청년을 크게 고무시켰다. 곧바로 두 번째 작품 활동에 돌입한 스물네 살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앞으로 써내려 갈 자신의 작품들이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흠뻑 가져다줄 것임을 확신했다. 중편소설 <분신>은 그렇게 야심만만하던 시절에 쓴 도스또예프스끼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그 기대가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칭찬 일색이었던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분신>에 대한 러시아 문단의 평은 냉담했다. 그나마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 봐둔 벨린스끼 정도가 혹평을 아꼈으나 나머지 사람들의 반응은 처참했다. 이야기는 지루하고 구성도 형편없다는 게 대다수의 평가였다. <분신> 발표 당시 낙심한 도스또예프스끼는 주변 문인들이 자신의 멋진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며 억울해했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는 그 스스로도 이 소설이 실패한 작품임을 인정했다.
“이 소설은 완전히 실패작이었다. …(중략)… 이 소설의 형식은 완전히 실패했다.”(도스또예프스끼의 <작가 일기> 중에서)


문제적 인간, 골랴드낀
당대 사회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과(당시 러시아에서는 이를 ‘자연주의 문학’이라 불렀다) 가슴 절절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면모, 무엇보다도 가난의 심리학을 탁월하게 파고든 도스또예프스끼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과 달리, <분신>은 도플갱어의 출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에 자아분열이라는 정신병리학을 섞어 넣은 일종의 심리 소설이었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이렇다.
뻬쩨르부르그의 하급 관리 골랴드낀은 소심하지만 자기애도 강한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항상 살피면서도 자존심 하나는 높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연모하던 여인의 생일파티에 찾아갔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감만 잔뜩 안고 돌아온다.
그날 밤 주인공 골랴드낀은 도심 다리 위에서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언뜻 스쳐가는 누군가가 자신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쩌면 환각일지 모른다고 치부한다. 하지만 다음 날 관청에 출근한 그는 깜짝 놀란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복장을 한 누군가가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주변 누구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골랴드낀은 점점 영악해져 가는 분신(작은 골랴드낀)의 행동에 당혹스러워하다가 끝내는 울화가 치밀고 만다. 어느새 분신은 골랴드낀의 일상 중심으로 침입해오고 정작 골랴드낀 본인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결국 우리들의 가여운 주인공이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도플갱어의 출현이라는 이 기괴한 이야기는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 골랴드낀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엄연한 사실이었을까. 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기괴한 이야기는 당대 러시아 문단 최고봉에 있던 고골의 대표작 <코>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어느 날 코가 없어진 한 남자. 그런데 그 코가 사람 행세를 하며 주인공의 일상을 위협한다는 설정. 고골의 코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에서 분신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 <분신>이 고골의 단순한 아류 정도로 취급되는 건 좀 부당한 대우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뒤로 갈수록 산만해지면서 구성의 묘미를 상실하지만, 대신 그 안에는 훗날 대문호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 문제적 인물들의 원형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라스꼴리니꼬프(죄와 벌), 스따브로긴(악령), 표도르 까라마조프 등 도스또예프스끼가 자신의 페르소나들을 통해 인간 마음속 깊숙하게 자리한 어둠을 응시했다면, 그리고 깊은 통찰을 통해 위대한 문학의 성채를 쌓았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성채의 초석은 바로 이 ‘문제적 인간’ 골랴드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분신>은 분명 실패한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깊은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가파른 문턱인지도 모른다.


파국의 시작
그리하여 전도 유망했던 청년작가는 자신의 두 번째 작품 <분신> 하나로 찬사와 선망에서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급격히 추락한다. 소설 속 주인공 골랴드낀처럼 유약하지만 자기애 또한 강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삶도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다. <분신>의 실패는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또 다른 파국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가 <죄와 벌>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까지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도박, 외도, 간질, 형무소 생활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것들을 버라이어티하게 골고루 섭취한다. 그중에서도 돈을 펑펑 써대는 낭비벽에 있어서는 가히 악마적 재능이 그에게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적 인간 도스또예프스끼! 우리는 <분신> 발표 이후 급격히 추락해 가는 그의 삶을 목도하며, 훗날 그가 대문호로서 보여준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둠 또한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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