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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 연재 [벗에게 시간을 묻다]
손내 선생님께
박형진(2021-02-03 13:57:34)


벗에게 시간을 묻다


손내 선생님께


먼저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김은정 기자님에게도 말했다시피 저 같은 ‘무식한’에게 먼저 발길을 내주셔서 고맙고, 조금은 미안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편지를 받은 것은 12월 17일께입니다. 답장이 늦은 것도 겸해 미안합니다. 



답이 늦은 것은 사실 오래된 제 버릇이에요. 저는 소싯적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때부터 받은 편지를 뜯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두고 며칠씩 궁금했고 설레임을 즐기는 버릇이 있었지요. 그 기간이 어떤 때는 20일이 넘어갈 때도 있었지요. 그래서 중요한 약속을 놓쳐버린,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개봉하지 않은 편지 몇 통 간직하고 있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됩니다.


어쨌든 고약한(!) 저의 이 고쳐지지 않은 버릇 때문에 답이 늦은 것 용서하소서!


어제는 면 소재지에 있는 농협에 갔습니다. 농협 사무실을 이번에 리모델링하면서 한편에 열 평 남짓의 공간을 따로 두었는데 그 공간을 ‘전통농업생활전시 체험관’이라 이름하고 작은 도서관 농업유물관 공예체험관으로 쓰기 위함이랍니다. 저는 이번 겨울의 여러 날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짚공예를 가르치고 농업유물을 수집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합원의 한사람으로서 하는 자원봉사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짚공예를 가르치던 중에 우연찮게도 농업방송에서 하는 자전거여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생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솥내(손내)마을이라는 것과 옹기막의 이름을(내력을) 알게 되어서 반가운 마음과 함께 선생님을 부르는 이름으로 쓰리라 생각했어요. 괜찮은가요? 호처럼 쓰시면 어떨까요? 아예…….


12월을 이틀 남겨놓고 이곳은 눈이 많이 옵니다. 작년에는 겨우내 눈다운 눈을 구경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세 번째 내리는 눈이고 날씨마저 굉장히 매섭군요. 이런 걸로 보아 내년에는 농사짓기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춥지 않았던 겨울 날씨 탓으로 여겨지는 좋지 않은 농업 현상들이 금년에는 참 많았거든요. 과일나무나 각종 곡식들의 개화와 결실이 왠지 모르게 션찮디 션찮고 병해충은 기승을 부렸으니까요. 그래서 이 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가 반갑기도 합니다.


늘 그렇듯 저는 겨울에는 주로 땔 나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20여 년쯤 전에 저는 원래부터 살던 마을 집을 버리고 그곳에서, 1km 남짓 떨어진 ‘큰골’이라는 산골로 흙벽돌집을 짓고 들어와 살고 있는데요, 방이 모두 구들방인지라 나무를 아니할 수 없군요.


바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싼 곳인지라 땔나무는 무진장입니다. 굳이 생나무를 베지 않고 쓰러진 거나 죽은 나무만 모아들여도 충분하지요. 연중 하고많은 일중에서 저는 나무하는 일을 가장 가볍고 편안하게 즐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일들은, 그러니까 농사일들은 어쨌든 무언가에 쫓기는 부분이 있는데 나무하는 일은 일이 아니고 유희에 가깝다 해야 할까 아니면 무위라고나 할까ㅡ 굳이 이름 지어 얘기한다면 그것이 채취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칡덩굴로 묶지 않고 가볍게 한 아름씩만 옆구리에 끼고 서너 번 산을 오르내리면 하루의 양이 충분한데 이렇듯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그때는 미리 한 삼사일 땔 것들을 모아들이느라 몸이 더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또 좋아하는 게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는 일입니다. 지금 같은 한겨울에서 내년 삼사월까지는 캘 것들이 여무는 때라 물때만 맞으면 저는 빼지 않고 바다를 간답니다. 아시다시피 변산은 산골이면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서해바다여서 내 몸이 부지런하기만 하면 호미 한 자루만 있어도 먹고 살 만한 곳이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단순한 취미일 뿐입니다. 조개나 굴을 따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면 종종 농사일도 이와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봅니다만 아무리 되는대로 거둔다고 생각하고 지어도 농사는 제게 실망을 안겨주기 일쑤입니다. 하여 제가 쓴 많은 시들은 결실의 풍요로움을 노래하기 보다는 쓰라린 실패의 기억이거나 사계절을 두고 땅에 조응하는 그 과정들을 이야기할 뿐이었습니다. ‘녹색세계사’에서 인용해 주신 내용들은 현재의 농사 형태나 코로나19 사태에 많은 시사점이 있어 저는 두서너 번 곱씹어 읽으면서 그 의미를 새기려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오랫동안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 해를 넘기지는 않을 생각으로 답장을 씁니다만 점점 더 억세게 쏟아지는 이 눈발을 뚫고 우체국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또다시 미안해지는 군요. 새해에도 모쪼록 좋은 그릇들을 만들기 바라며 내내 건강하소서. 악필이었습니다.


2020.12.30.

박형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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