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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⑭
시어머니의 가족
임안자(2021-02-03 14:11:03)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⑭


시어머니의 가족

임안자 영화평론가





시어머니의 조부모

시어머니 에리카 보스(1911-1987)는 툰호수(Thuner

see) 남쪽의 스피츠(Spiez)의 출신으로, 원래 친정집의 가족들은 그린덴발트(Grindenwald)에서 살았었다. 베른 알프스산맥의 아이거(Eiger) 기슭에 들어앉은 그린덴발트는 4천여 명이 사는 작은 도시었다. 그럼에도 1천 미터 높이의 위치에 놓여있어 겨울에는 스키꾼들과 관광객들을 융프라우(Jungfrau, 숫처녀라는 뜻) 산속으로 이어주는 출구로,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융프라우 맞은편에 우뚝 솟아있는 아이거-노르드반드(Eiger-Nordwand)에 오르는 등산객들의 숙박지로서 일 년 내내 여행자들이 붐비는 관광지로 발전했다. 이야기를 잠깐 뒤로 돌리면, 시어머니의 조부모는 19세기 말경 스위스에서 관광 사업이 막 싹틀 무렵에 그린덴발트에서 호텔 “곰들”(Baeren)을 열었다. 그리고 조부가 사망한 뒤에도 조모가 혼자서 호텔 사업을 계속함으로써 지역의 화젯거리가 됐었는데 이유는 그때까지 스위스에서는 여자가 독자적으로 호텔 관리를 도맡았던 전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방 행정처로부터 “스위스 최초의 여성 호텔 소유자”로 인정을 받아 그린덴발트 지역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시절의 스위스 혼인법에 따르면 부인은 남편의 승낙 없이 직업을 가질 수 없게 돼있었다. 결혼한 부인에게 직업이 허락된 건 1976년에 혼인법이 바뀌면서부터였는데, 조모의 경우 만일 남편이 죽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직업적으로 그 같은 영광의 기회가 주어졌을까 싶다.)


시어머니의 부모

조모의 “곰들” 호텔이 집안 사정으로 문이 닫히자 시어머니의 부모들은 그린덴발트를 떠나서 독어권 지역 한가운데에 있는 아라우(Aarau) 시에서 조그만 호텔을 몇 년간 운영했다. 그러다 1920년에 “그랑 호텔 스피처호프 (Grand Hotel Spizerhof)를 사들이면서 스피츠에 정착하게 됐다. 스피츠 유람선 정거장 옆에 세워진 그랑 호텔은 1873년에 지어진 것으로 “세기말”의 독특한 건축미에다 60명 손님을 수용하던 지역에서 으뜸가는 호텔이었다. 시어머니의 아버지 아놀드 파울 보스는 원래 직업이 호텔 전문 요리사였다. 그러다 루체른의 부잣집 딸 한니 리니커와 결혼하여 스피츠에서 으뜸가는 호텔 주인이 되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호텔 주변의 샬레(Chalet, 스위스 특유의 조그만 나무집)와 그 앞의 주점 등 상당히 넓은 땅과 건물들이 그의 소유물이 됐다.


그럼에도 보스 가족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괴팍스러웠고 가족에게 애정도 관심도 별로 없었던 무뚝뚝한 독불장군이었다. 부인의 재산으로 그만큼 출세를 했음에도 그녀를 홀대하고 네 명 자녀들과도 말다툼이 그치질 않았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외할머니마저 성격이 차갑고 너그럽지 못하여 집안 분위기는 맨날 쌀쌀했다. 루체른의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란 할머니는 부모와 사제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그녀가 원하는 프리이마워라이에 속한 남자와 결혼을 했을 정도로 독립심이 강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혼 뒤에는 남편의 독주에 맞서기는커녕 불평 없이 오히려 고분고분했다. 그런 반면에 자식들에게는 시종일관 매서울 정도로 엄격했고 혹시 부자간에 문제가 생기면 성난 남편 앞에서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나 몰라라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가족 누구한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다 할아버지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와 네 형제자매

시어머니의 부모들이 타계하면서 1955년부터 호텔 경영은 젊은  세대 쪽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맏딸인 시어머니가 두 번째 여동생 프레니와 함께 한동안 호텔을 이어가다 집안의 편리를 위해 셋째 남동생 한스 루디 보스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베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일찍이 진보 정치에 적극 참여했던 좌파계의 청년으로 누가 봐도 호텔 대표 자리에 썩 어울리진 않았지만 정치적 성향 때문에 호텔 운영에 문젯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1968년의 “프라하의 봄” 사건 이후 소비에트 정책에 실망하여 정치로부터 멀어지면서 호텔 사업에만 치중했다. 그리고 베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막내 남동생 오토 보스는 50년대 중반부터 주로 러시아와 동유럽의 사업계의 법적 분야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그 역시 프라하의 사건 뒤 직업의 방향을 국내 쪽으로 돌렸다. (“프라하의 봄”은 두 개의 상반되는 사건을 뜻하는데, 첫째는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시민의 민주화 운동이며 둘째는 1968년 8월 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 운동을 중단시킨 사건이다.)




오랫동안 잘나가던 그랑 호텔 스피처호프는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객의 인기가 눈에 띄게 떨어지고 그에다 외삼촌도 정년퇴직 나이에 가까웠던 터라 퇴임 문제가 다급해졌다. 하지만 후계자를 찾지 못하여 하릴없이 1975년 말경에 호텔을 그만뒀다. 그것으로 3세대를 이어온 보스 가족의 호텔 사업은 끝이 났다. 그게 우리가 결혼한 지 두어 달 뒤였는데, 외삼촌과 외숙모 헤디는 호텔을 폐업하기 전에 결혼 선물로 호텔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우리를 초청했다. 그리하여 처음이며 마지막으로 호텔의 귀빈실에서 최고급의 저녁식사 대접을 받으며 전망이 아주 좋은 방에서 멋진 하루를 맘껏 즐겼다. 그 뒤에 호텔은 허무하게도 빨리 허물어졌다. 겉으로는 아직 멀쩡하게 보였지만 100년이 넘다 보니 호텔의 내부 구조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의 고급 호텔의 수준에 맞추려면 현대식의 난방장치와 엘리베이터 등이 당장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들을 새로 설치하려면 천문학적 단위의 비용이 필요했는데 그럴 만한 투자가가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한 세기의 고풍스러운 “그랑 호텔 스피처호프”는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탈리아 가족이 운영하는 평범하고 자그만 호텔과 음식점이 들어섰는데, 호텔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많이 보냈던 남편은 옛 호텔에 대한 그리움을 오랫동안 떨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외삼촌은 호텔은 없어졌더라도 고향 스피츠에서 가족들이 자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옛 샬레 자리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에서 3층짜리 집 한 채를 사들여 동생들에게 각각 아파트 하나씩 선물을 하고 본인은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퇴직 후의 삶을 새로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리도 성탄절이나 여름휴가 때면 시어머니의 가족과 함께 스피츠에서 휴일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쉽게도 외갓집 가족들 대부분이 타계하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그들 아파트는 모두 타인의 휴가 집으로 바뀌었고 시어머니의 것만 남게 됐다.




스피츠의 휴가 집

80년대 중반에 시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스피츠의 아파트는 겉모양은 별로지만 내부는 건축가인 친구가 우리의 취향에 맞게 새로 고쳐줘서 아담하고 위치도 아주 좋았다.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국보 “스피츠 성”에까지 집에서 걸어 5분이면 닿는데 성곽은 스피츠 관광의 중심지다. 낮은 언덕 위로 올라가 성에 다다르면 야산으로 둘러싸인 파란 호수가 시원스럽게 떠오른다. 툰과 인터락켄을 연결하는 스위스에서 네 번째로 큰 툰호수다. 그리고 멀리 인터락켄 뒤로는 4천 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들이 거대한 평풍처럼 펼쳐있다. 날씨가 좋으며 왼쪽 쉬렉혼(Schreckhorn)에서 오른쪽으로 아이거-노드반드와 융프라우 그리고 불루엠리스알프(Bluemlisalp)까지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늘 달라지는 알프스의 풍경은 언제 봐도 신비스럽고 황홀하며 구름이 끼지 않는 날은 해가 질 무렵에 “알펜장미”(Alpenrose)를 볼 수 있다. 일몰 직전의 마지막 햇빛이 눈에 덮인 알프스 산위에 씌워지는 찰나에 눈의 하얀색이 차츰 연분홍색으로 바뀌는 현상인데 길어야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순간적인 빛 놀이의 아련한 모습은 말 그대로 알프스 눈 속의 장미(빛)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인지 알프스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알펜장미” 이름이 붙은 호텔과 음식점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리고 스피츠 성 앞의 자그만 로마네스크 형식의 교회 역시 전망이 아주 뛰어난 데다 실내의 고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결혼식장으로도 인기가 대단하다. 여기서 남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했다고 했는데 우연찮게 우리 딸도 십여 년 전에 같은 곳에서 결혼을 했다. 우리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교회의 아름다움에 끌려 지금도 가끔씩 들리곤 한다. 그런 한편 스피츠 성의 뒤쪽은 그다지 넓지 않은 포도밭들과 울창한 숲들, 그리고 봄의 화사한 벚꽃들이 사시사철 전원의 풍치를 이루고 있어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곳 전통에 따르자면 스피츠에서 포도 농사는 이미 천 년 전에 시작됐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포도주 애호가들이 취미로 포도주 생산을 하고 있으며 술맛도 다른 지역의 포도주에 견주어 많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지역에서는 특산품 대우를 받고 있으며 해마다 포도가 익어가는 가을이면 포도 수확의 축제가 열리고 전통 의상으로 차려입은 마을 사람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포도주 통을 마차에 싣고 거리를 돌며 잔치 분위기를 돋운다.


스피츠 휴가 집이 또 하나 좋은 건 툰호수의 물이 마당 바로 밑에까지 들어온다는 점인데, 호수는 언제 봐도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고 맑다. 알프스의 빙산에서 내려오는 물이어서 한여름에도 섭씨 20도를 넘을 때가 드물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바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여름에는 수영을 할 수 있고 옛날에는 아이들이 낚시 연습도 했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훤히 쳐다볼 수 있는 2천2백 미터 높이의 니센(Niesen)산도 모양새가 아주 특이하다. 스피츠에서 3-4Km 떨어져 있는 니센 산봉우리에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알프스 산들과 툰호수에서 부리엔저 호수(Brienzersee)까지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참고로 인터락켄(Interlaken)은 두 호수 사이라는 뜻으로 위의 두 호수 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무튼 피라미드를 닮은 삼각형의 웅장하고 오묘한 니센의 모습은 여러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스위스의 유명한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이 유명하다. 스피츠의 속담에 “니센 산봉우리에 구름이 모자처럼 쓰여 있으면 다음날 날씨가 좋고 구름이 산등성이에 긴 검처럼 걸려있으면 비가 온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도 90%는 들어맞는 것 같다. 스피츠는 칸톤 베른에 속하며 2천여 명이 살고 있는 조그만 도시로서 주류 생산업은 철도와 관광이다. 오래전부터 스피츠는 스위스의 주요 도시인 바젤, 취리히, 베른, 제네바를 연결하는 철도역의 중심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관광업은 인터락켄에 가까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스피츠에 자랑거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이곳 공식 홍보에 따르면 “스피츠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만(海灣) 도시다.” 도시는 사실 드러나게 예쁘진 않지만 성곽 주변을 둘러싼 호수 자락의 잔잔한 풍경은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그뿐 아니라 스피츠는 스위스 요트 스포츠의 중심지다. 유람선 정거장 옆에는 1935년에 지어진 스위스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요트 학교가 있으며 50명의 강사들이 그곳에서 50개 종류의 요트 운동 기술과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다. 스위스에는 바다가 없지만 그 대신 크고 작은 호수들이 숱하게 많다. 게다가 바람과 햇빛의 양도 툰호수처럼 요트 스포츠에 알맞은 자연적 조건이 갖춰진 데는 없다고 하며, 아이거, 묑흐(Moench), 융프라우 같은 알프스의 희귀한 천연적 배경까지 합쳐서 툰호수의 인기를 한몫 높이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피츠는 인터락켄의 관광 시설에 의존도가 높다. 스피츠를 들리는 한국 관광객을 보더라도 대부분 인터락켄에서 유람선 아니면 기차로 오는데 그중에 스피츠 호텔에서 머무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내 기억에 스피츠에 한국 여행객들이 오기 시작한 건 7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시절에는 거의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짜인 단체 여행이었다. 그러다 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단체 여행은 거의 없고 갈수록 부부나 친구끼리 아니면 개인 차원의 여행자들인데 우리 휴가 집이 유람선 정거장에서 가까워서 그런지 집 앞에서 때때로 한국 여행객을 만난다. 대충 고개 인사로 끝나지만 어쩌다 말을 건넬 때도 있는데 말이 길어지면 집에 들어가 같이 커피나 차를 마신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문제가 스위스에서도 심해지면서 한국 관광객들을 전혀 볼 수  없어 좀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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