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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⑮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인터락켄과 융프라우
임안자(2021-03-04 11:18:45)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⑮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인터락켄과 융프라우




2020년은 스위스의 관광 역사에 가장 심한 재난의 시절로 기록될만하다. 원인은 두말할 것 없이 코로나 팬데믹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스위스의 집단 관광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터락켄과 융프라우 지역에 불어닥친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지난 2020년 9월 말에 인터락켄 관광 사무소의 홍보담당자 크리스토프 라입운드구트씨와 메일 인터뷰를 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의 대답과 지역 일간지의 기사에서 따온 것이다. 

“인터락켄의 대형 호텔 마텐호프(Mattenhof)는 작년 말까지만 해도 날마다 220명 여행객들로 꽉 차있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제재로 세계 각처에서 숙박 예약이 모조리 취소되면서 호텔이 텅 비어 3월 초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보통 하루에 1만 명이 넘던 관광객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50여 명의 한국인들을 실어 나르던 대형 버스들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겪는 크나큰 위기다. 통계에 의하며 2019년을 기준으로 인터락켄에서 호텔에 머무는 관광객은 일 년에 평균 100만 명 정도였다.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이 11만 명을 조금 넘었고 다음은 10여 년 전부터 오기 시작한 중국인들이 13만 명 이상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동양을 포함한 세계 여러 곳의 여행객 수가 79%까지 줄어들었다. 그 결과 2019년에 융프라우 기차의 교통비로 거둬드린 수입이 53,300,000 프랑으로 어느 때보다 높았었는데 2020년에는 그 절반도 못될 전망이다. 융프라우가 관광객들 사이에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세기 60년대로 여행객은 주로 영국과 일본에서 왔다. 그러다 70년대에 한국 여행객이 급수로 많아졌으며 그다음으로 인도와 아랍 지역 그리고 중국이 뒤를 따랐다. 융프라우는 오래전부터 영화 촬영지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20여 년 전부터 인도의 영화인들이 융프라우를 무대로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에서도 여러 촬영팀이 다녀갔다. 그중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Clash Landing on You)’이 좋은 예로서 우리도 관심을 가지고 봤으며 듣자니 한국에서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듯하다.”



인터락켄과 융프라우가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관광업체 쪽에서는 과거에 홍보와 서비스 면에서 지나치게 외국 여행객에게만 치중했음을 깨닫고는 재빨리 오류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중점은 어떻게 하면 다시 스위스 시민의 호기심을 끄느냐에 있는데, 실제로 2019년에 융프라우를 구경한 스위스인이 19%도 못될 정도로 낮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스위스인에게 융프라우는 의례 돈 많은 외국 사람들이나 드나드는 비싼 곳으로 인식됐다. 아니면 가고는 싶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비좁아서 또는 융프라우는 날씨가 좋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망설였다. 하지만 코로나 전염의 위험으로 외국 관광객들이 발을 끊고 스위스 국경이 완전히 막히면서 스위스 대중에게 국내의 관광지들이 새로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융프라우도 그중의 하나다. 거기엔 그동안 국내 관광지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뉘우침도 있지만 ‘드디어 우리의 융프라우를 되찾았다’는 자만심, 단결심도 엿보인다.



아무튼 때가 때인 만큼 남편과 나도 9월 초에 우리의 결혼 45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융프라우로 갔다. 나는 이미 51년 전 스위스에 정착한 뒤 친구들과 한 번 갔었지만 남편은 그게 처음 길이었다. 날씨가 아주 화창하던 날 우리는 바젤에서 기차로 인터락켄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융프라우 기차를 바꿔 타고 2,061m 위에 있는 “작은 솨이덱(Kleine Scheidegg)”까지 올라갔는데 그게 마지막 정거장이었으니 융프라우 산꼭대기까지의 반절을 올라간 셈이다. 호텔 벨뷰에서 짐을 푼 다음에 항상 멀리서만 바라보던 아이거-노드반드, 묑흐, 융프라우를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눈을 밟으며 호텔 주변을 한참 걸었다. 눈의 두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얇았다. 최근 어디서나 자주 듣게 되는 지구 온난화 현상이다. 갑자기 ‘지난 몇 년 동안 기후 변화로 알프스에조차 눈이 평균 이하로 적게 내려 산속의 호텔들이 스키 여행객 부족으로 걱정이 태산 같다’는 어느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끝없이 넓고 드높은 산속의 산봇길은 아름답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비경이었다. 그 시리고 맑은 공기와 지상의 모든 잡음을 잊게 해주는 고산 지대의 고요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우리는 지난 45년간 같이 보낸 삶에 대한 이야기로 아기자기스레 초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그곳에서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전용 기차로 9.34km 길이의 얼음산 속의 터널을 지나서 35분 뒤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우리가 내린 곳의 위치는 3,454m 높이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정거장이라 해서 “유럽의 꼭대기(Top of Europe)”로 불리는데 여행객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다. 거기서도 융프라우는 692m 더 위에 있었다. 융프라우 전용 기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원이었다. 거의가 스위스 여행객들이었었는데 그건 음식점이나 호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는 평소에 언어 차이 때문에 독어권 지역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불어권 쪽의 관광객이 눈에 띄게 많았는데 관광업계의 노력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일 테다.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융프라우는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가, 시인, 학자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높았으나 접근이 불가능한 위험지대로 취급됐다. 그러다 19세기 초에 어느 형제가 융프라우에 성공적으로 오르면서 등산 가능성이 확인됐다. 그리고 19세기 말기에 “산간 철도 열풍”이 일어나면서 몇몇 건설업자를 통해 여러 가지 시도가 꾸준히 계속됐는데 그런 과정에서 여섯 명의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결국 공사는 16년 만에 끝났다. 그리고 1912년 8월 1일에 세계 최초의 스위스 발명품인 톱니바퀴식 철도(Zahnradbahn) 시스템의 전용 기차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첫 출발을 했다. 


빙산 밑 융프라우 정거장에서 내린 뒤 우리는 2백 미터 길이의 쇼핑센터를 한 바퀴 돌았다. 완전히 얼음으로 지어진 찰리 채플린 방에서 나는 얼음덩어리 채플린 감독님께 인사를 하고 나오다가 그만 얼음에 미끄러져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다행히 옷을 두껍게 입어서 다친 데는 없었다. 그런 뒤 우리는 1924년에 완성된 레스토랑 “산집 융프라우”에서 내가 좋아하는 퐁뒤를 즐겼다. 벽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음식점”이라고 쓰인 광고가 보였다. 퐁뒤는 눈이 올 때 잘 어울리는데 나는 융프라우 꼭대기를 마주 바라보며 구릿한 치즈 냄새를 즐겼다. 스위스에 처음 왔을 때다. 멋도 모르고 퐁뒤를 먹다가 지독한 냄새에 질려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그걸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식사 후 1931년에 지어진 기상학, 빙하학, 천문학 등의 연구실들이 들어 있는 “스핑스 기상대(Spinx-Observatorium)” 의 베란다로 올라갔다. 밖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빛, 엄청난 속도로 이리저리 나르는 알프스 새들, 눈 속의 꽃들, 벨뷰 호텔에서 보던 것과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저렸다. 그제야 왜 세계 각처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지를 알 것 같았다.



                                                                   4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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