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1.10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22)
바젤로 돌아가다
임안자 영화평론가(2021-10-08 14:03:28)


바젤로 돌아가다


1977 5 말에 우리는 여섯 달이 현을 데리고 랑나우에서 바젤로 삶터를 옮겼다. 70년대에는 제네바 다음으로 아파트를 구하기가 스위스 전국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이 바젤이었다. 그리하여 아파트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남편이 알고 있던 어느 안과 의사의 오래된 집의 3 다락방에서 아쉬운 대로 넘게 살았다. 꽤나 비쌌던 월세방은 그런데 아주 비좁았고 3층의 드높은 층층대는 어린애를 안고 오르내리는 불편스럽다 못해 위험스럽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넘는 실내 목조건축물의 예스러움이 보통 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느낄 없는 낭만적인 데가 있어 그런대로 불편함을 견디며 살았다. 그런데 하나 좋았던 것은 뒤에 예쁘장한 정원이 있어서 뜨거운 한여름에 쉼터로서 시의적절했다. 그래서 주인집 가족이 장기간에 걸쳐 여름휴가를 떠난 나는 현하고 정원에 자주 내려가 시원스레 바깥바람을 쐬었고 애기가 잠들면 조용히 독서를 했다. 랑나우에 적에 시작된 남아메리카의 문학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그때까지도 여전하여 틈틈이 남미 작가들의 소설을 계속 읽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자 남편은 7월부터 바젤시의 브르더홀즈 병원(Bruderholz Spital) 노인환자 병동에서 동안 일했다. 그곳의 근무는 하루에 8시간으로 충분했고 밤이나 주말에 추가 작업이 없어서 별로 신경 없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자 남편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대학 시절에 가담했던 진보 단체의 활동 영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1975년에 병리학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학문 분야보다는 의학계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성에 중점을 두고 방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를 들어 그는국가공무원 서비스 협회 분야인전국보건의료단체에서 1976년에서 1979년까지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바젤에 돌아온 뒤로는 지역의 일간지인바즐러 자이퉁”(Basler Zeitung) 가끔씩 기고하면서 주로 의료 분야의 사회적 문제점에 대해 비평적인 글을 썼다.


딸의 출생

우리가 바젤에 정착한 뒤에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 번째 임신 때에는 야생초 꽃가루의 알레르기성 비염에 걸려 줄곧 흐르는 눈물, 콧물이 짜증스럽고 귀찮았으나 외에는 대체로 건강한 편이어서 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나 번째는 임신 다섯 달이 되자 갑자기 체중이 부쩍 늘고 배가 번에 비해 빠르게 불룩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몸의 아랫부분에 정맥류증과 치질이 돋아나고 그에다 소변 실금증까지 겹쳐서 출산을 앞두고 두어 동안 나는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그러다 5 2일에 예상보다 빠르게 애를 낳게 되었다. 말을 잠깐 뒤로 돌리면, 출산 전날 남편은 현을 데리고 바젤의 동네에서 열린 5 1일의노동자 행사에 참가하고 오후 늦게 돌아왔다. 남편과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그날따라 너무 피곤하여서 일찌감치 침대에 누워 막심 고르키(Maxim Gorki, 1868-1936, 러시아 작가)어머니 읽었다. 그리고 11시에 소설의 마지막 장을 끝내고 불을 끄려는데 느닷없이 밑에서 물이 왈칵 쏟아졌다. 출산 예정일보다 3 전이였던 지라 내가 놀라서 남편을 깨우자 깊이 잠들어 있던 그가 일어나 흥건히 괴어있는 물을 살펴보더니양수가 터진 같다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시누이 베라에게 전화하여 현을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나를 데리고 바젤시립병원의 산부인과의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아홉 시간이 지난 다음 아침 7시쯤에 나는 딸을 낳았다. 새까만 눈망울에 검은 머리의 애기는 아주 튼튼해 보였고 나를 빼닮아 마냥 기뻤다. 산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남편은 애기를 보자이라며 좋아서 싱글벙글하면서딸이 신통하게도 엄마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미리 나왔다 출산으로 지쳐있는 나를 웃기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순간 우리는 아들 현이 태어나고 1 4개월 뒤에 미자 이본느를 얻게 되어 너무 기뻤다. 미자의 이름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면, 한국의 친지들은 한결같이예쁜 이름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구태여 한국의 구시대 이름을 줬냐 빈정거렸지만 사실 내가 원했던 이름은미지였다. 그런데 시누이의 딸들이 이름과 비슷한 미자가 친근감을 준다며 자꾸 바꾸라고 졸라서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와 달리 이본느는 내가 프랑스의 어느 작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미자는 유럽에서 이름이 예쁘다는 칭찬을 꽤나 많이 받는 반면에 내가 딸을 위해 찾아준 이본느는 섭섭하게도촌스런 옛날 이름이라고 번도 쓰지 않아서 이름은 여전히 출생 증명서에 기록돼 있긴 하지만 쓸모없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유럽에서는 대부분 이름이 서너 개이며 그중의 하나는 조부나 친척들의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지로 사용되는 이름은 번째이고 나머지는 공식 서류에 기록돼 있는데, 글에서 내가 아들의 둘째 이름 현을 사용하는 한국의 독자를 위해서이고 집에서는 이름인 카르로 불린다. 

   11월호에 계속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