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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 | 연재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광기와 폭력의 끔찍한 악몽
이휘현 PD(2021-10-08 14:22:16)


광기와 폭력의 끔찍한 악몽

이휘현 KBS전주 PD



하나의 비극적 사건

1869 11 모스끄바 농과대학 인근 연못에서 시체가 하나 발견되었다. ‘이바노프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근처 숲에서 살해당한 이곳 연못에 유기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들이 잡혔다.

명의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살해집단은, 놀랍게도 러시아 국가 전복을 꿈꾸었던 혁명가 그룹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수장은네차예프라는 인물로, 같은 모스끄바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성해 이듬해(1870)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계획을 품고 있었다. 

5명이 모여 형성한 그룹에는 살해당한 이바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조직의 나머지 4명이 모두 이바노프 살해에 가담했다는 의미했다.

혁명 과업 완수를 빌미로 네차예프는 조직원들을 호되게 훈련시켰다. 아울러 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광기의 소용돌이에서 언제부턴가 이바노프는 서서히 이탈하기 시작했다. 네차예프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바노프가 자신들을 배신하고 러시아 당국에 조직의 혁명 계획을 밀고할 것이라는 미명하에, 네차예프는 나머지 명을 사주해 이바노프를 살해한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는 네차예프 그룹 내에서정치적 단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비극적인 소식은 러시아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유럽에 체류 중이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도 소식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군다나 희생자 이바노프는 당시 모스끄바 농과대학생이던 처남(아내 안나의 남동생) 친구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젠가 처남으로부터 이바노프에 관한 호의적인 평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비극적 사건이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백치>(1868) 발표 <영원한 남편>이라는 가벼운 작품을 내면서 차기작으로 종교를 주제로 대작을 준비 중이던 도스또예프스끼는(제목은 <위대한 죄인의 생애>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형 프로젝트를 잠시 보류하고 네차예프 사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소설의 집필은 3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미 벌어진 사건에 인물과 공간만 바꿔 끼우면 흥미로운 작품이 금세 탄생할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작 소설의 집필은 하나의 악몽처럼 작가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작품의 완성은 애초의 계획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넘긴 1971년에 가서야 이룰 있었다.

사이 그의 원대한 포부가 투영되었던 대작 <위대한 죄인의 생애> 집필 계획은 몇몇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신작 소설로 흡수되면서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나머지 일부는 훗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흘러가 위대한 종교소설의 마중물이 되어 줌으로써 지상에서 존재 의의를 끝냈다.

여하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신작은 <악령>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선을 보였다. 그의 5 비극 시간순으로 번째 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은,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세계에서 가장정치적인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제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도록 하자.


광기와 폭력의 끔찍한 악몽

소설의 배경은 어느 한적한 소도시다. 이곳의 재력가이자 여지주인 바르바라 뻬뜨로브나 스따브로기나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아들 하나를 애지중지 키워왔다. 아들의 이름은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이하 스따브로긴). 그는 바르게 크길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나이가 들자 주변 사람들에게 기괴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여러 여자들과의 염문이 들려오니 어머니인 바르바라 입장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놈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아들의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20 넘게 바르바라에게 기생 중인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이하 스쩨빤). 

말로는 교양을 설파하고 자신이 가진 학식의 위대함을 뽐내고자 혈안이 되어있지만, 실상 우스꽝스러운 인물은 여지주 바르바라에게 오랜 시간 빌붙어 사는 잉여 인간에 가깝다. 

그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다. 이름은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이하 뾰뜨르). 그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로부터 거의 부양받지 못한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자랐다. 악당으로서의 면모가 다분한 뾰뜨르는 1860년대 러시아 청년들을 휩쓸던 급진 사상을 체득한 인물이기도 했다. 수하에 5인조로 구성된정치적 졸개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그이지만, 여지주 바르바라의 아들 스따브로긴에게 만큼은 끝없이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 스쩨빤은 바르바라에게, 아들 뾰뜨르는 바르바라의 아들 스따브로긴에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2대에 걸친 상하관계의 연대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명의 주요인물(바르바라, 스따브로긴, 스쩨빤, 뾰뜨르) 여러 주변인들이 다양한 이해관계와 상황으로 엮이면서 다소 산만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개의 살인사건을 맞이하면서 극도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도시의 지사로 부임 중인 렘브께의 아내 율리야가 뾰뜨르의 꾀임에 빠져 거대한 파티를 벌이는 사이 건너 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거기서 퇴역 대위이자 술꾼인 레뱌드낀과 그의 절름발이 여동생 마리야가 불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사체의 훼손 정도로 보아 남매는 화재가 일어나기 이미 살해되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도시 전체는 술렁인다.

레뱌드낀과 마리야는 소설의 주요 인물 스따브로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가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레뱌드낀을 금전적으로 끊임없이 도와줬을 뿐만 아니라 마리야와는 모종의 염문으로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따브로긴은 레뱌드낀의 여동생 마리야와 결혼할 것임을 선언한 상태였다. 

누가 범인인지는 소설 속에서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지만, 유형수인 페지까가 이들 남매를 죽이겠다고 설쳐댄 그리고 그런 그에게 스따브로긴이 돈을 건넸다는 사실이 기이한 사건에 여러 의혹의 인장을 새긴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일이 벌어지는데, 뾰뜨르를 추종하던 혁명 조직 5인방 명이었던 샤또프가 살해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범행은 뾰뜨르가 주도했고, 그를 추종한 5인방 살해된 샤또프를 제외한 나머지 4명이 모두 가담했다. 

뾰뜨르 일당과 함께 당대 러시아를 휩쓴 급진 사상에 경도되었던 샤또프는 어느 순간부터 무리로부터 이탈해 있었다. 혁명을 가장한 폭력과 광기에 넌덜머리를 내며()’ 품에 다시 안긴 샤또프는, 이유로 인해 나머지 뾰뜨르 일당에게는변절자이자 혹여 자신들의 혁명 계획을 당국에 폭로할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샤또프는 뾰뜨르 일당에 의해정치적 단죄라는 이름으로 처단되어 버린 것이다. 

사건에는 스따브로긴이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소설의 모호함은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소설의 끝에 이르러 스따브로긴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비극의 거대한 흐름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예언서, 악령

소설 <악령> 구성은 무척 산만하다. 꼼꼼하게 직조된 플롯이라기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작가가 이야기를 온전히 맡겨버린 형국이다. 일부 캐릭터는 일관성이 없고, 초반에 비중이 높던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는 후반부에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만다(<도스또예프스끼 평전> E.H.카는 스쩨빤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익살맞고 정감 가는 캐릭터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뿐인가. 악인으로 설정된 스따브로긴의 행동은 끝없이 애매모호하다. 그에 관한 사전 정보 또한 많지 않기에 여백을 채우기 위해 동원해야 상상력의 몫이 독자들을 크게 짓누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령> 도스또예프스끼의 대표작 하나이자, 누군가들에게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품어온 현실세계에 대한 시각을(혹은 사상의 궤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기 때문 아닐까.

1840년대 유럽의 자유주의에 경도된 청년 그룹, 그중에서도 가장 전위에 속했던 20대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로 인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처지였지만, 10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복귀 보여준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면모를 통해 점차 러시아 전통 사상(슬라브주의)으로 회귀해가고 있었다. 아울러 1860년대 차례의 유럽 여행을 통해 갖게 서구에 대한 실망스러운 인상, 그리고 러시아 기독교로의 감화, 거기에 당대 청년들의 마음을 휘젓던 급진 사상에의 냉소 등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정치적 보수화에 엔진을 달아주었던 것이다.

와중에 그가 마주한이바노프 살인 사건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광기와 폭력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전작 <죄와 >에서 라스꼴리니꼬프가사적 윤리(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에정치적 신념이라는 보태져 벌어진 집단 살인극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죄와 > 라스꼴리니꼬프는 범죄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확신에 사로잡힌 뾰뜨르는 그저 정치의 탈을 절대악이자 광기와 폭력의 화신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도스또예프스끼가 당대 급진 사상에 보여준 시선이 어땠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인물은 폭력의 희생자인 샤또프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샤또프라는 캐릭터를 작가, 그러니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 샤또프는 한때 혁명사상에 경도되었다가 무리로부터 이탈한 사람이다. 애초에 그는 정치적신념이라는 것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약한 성격에 쉽게 사람도 믿지 못하는 그가절대선()으로서의 정치 제도인간 의지의 완벽함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다. 

도스또예프스끼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대 그의 뇌를 지배했던 급진적 생각들은 어느샌가 휘발되어 버렸고, 어느새 50 노년의 문턱에 그에게는모호한 존재로서의 인간만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까. 도스또예프스끼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샤또프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상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은 성공한 보인다. 

훗날 <악령> 많은 이들에 의해러시아 혁명의 예언서 불리기도 했다. 지난 세기 지구의 절반을 지배했던정치적 신념의 흥망성쇠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려 했던 것처럼 수많은 깨진 거울들을 통해 왜곡되게 투영되었다. 와중에 수많은 샤또프 발생했고, 여전히 다른샤또프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악령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진경

이야기의 구조 측면에서 <악령> 철저히 실패한 소설이다(이는 도스또예프스끼도 원치 않는 바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을 연재한 단행본으로 출간할 개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야기는 산만하고 지루한데다가 페이지 분량은 이리도 많단 말인가! <악령> 읽어나가다 보면 <죄와 >, <백치> 얼마나 읽기 수월한 책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도스또예프스끼의 <악령> 섣불리 덤벼들지 말지어다. 허방에서 허우적대다가 종국에는 도스또예프스끼라는 거대한 바다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까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의 진경에 풍덩 빠지고 싶은 이가 있다면, 절대 <악령> 빼먹지 말지어다. 그의 완벽한 초상을 응시하고 싶다면 소설은 빠뜨려서는 되는 중요한 퍼즐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세계에서, <악령>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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