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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 | 연재 [코로나 시대의 집콕 배낭여행]
엘 그레코가 사랑했던 도시 톨레도
윤지용 편집위원(2021-11-09 15:52:13)

그레코가 사랑했던 도시 

윤지용 편집위원



마드리드 남서쪽에 있는 톨레도(Toledo) 마드리드 이전에 스페인의 수도였던 도시다.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있는 톨레도는 그대로천혜의 요새였다. 고대 로마제국 시절부터 서고트왕국, 이슬람 코르도바왕국, 카스티야-레온왕국까지 이곳을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다. 마드리드에서 가까워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도 있지만, 하루쯤 묵으면서 천천히 골목골목 둘러보는 것도 좋다. 2 년의 역사가 깃든 도시라서 반나절만 설핏 둘러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다.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아토차역에서 기차를 타면 톨레도까지 40분이 걸린다. 마드리드 엘립티카 버스터미널에서 알사(Alsa)버스를 타면 시간쯤 걸리는데 버스요금이 기차보다 약간 싸다. 톨레도의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은 모두 구시가지 동쪽 신시가지에 있다. 당연히 여행의 목적지는 구시가지이니 기차나 버스에서 내린 서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700미터쯤 걸어가면 타호(Tajo)강을 가로지르는 알칸다라 다리(Puente de Alcantara) 나온다. 타호강은 톨레도 구시가지의 동쪽, 남쪽, 서쪽을 휘감으며 U 모양으로 흐른다. 옛날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타구스(Tagus)강이라 불렀던 타호강은 이베리아반도의 서쪽 끝까지 1,000킬로미터를 흐른 리스본에서 대서양과 만난다. 포르투갈어로는 테주(Tejo)강이다.


타호강 협곡을 가로질러 구시가지로 연결되는 알칸타라 다리는 2 전에 로마가 세웠고 전에 이슬람인들이 증축했다고 한다.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자체가 역사여행의 시작인 셈이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성벽과 성문이 있다. 아치 모양으로 성문의 이름도 알칸타라 문이다. 성문을 지나 길게 이어지는 계단과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면 구시가지의 중심인 소코도베르 광장(Plaza de Zocodover) 나온다. 이슬람 점령 시절에는 양을 사고파는 가축시장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소코도베르 광장은 스페인 다른 도시들의 메인 광장에 비하면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광장에서 관광용 미니 기차인소코트레인 타면 구시가지를 돌아 밖으로 나가서 건너편 언덕에서 톨레도의 전경을 바라볼 있다. 



가지 종교가 공존했던 도시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들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톨레도는 그대로역사도시. 1986년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동안 여러 세력들이 도시를 거쳐갔다. 서기 1세기부터 수백 동안은 로마의 요새였는데, 시절의 이름은 라틴어톨레툼(Toletum)’이었다. 5세기 무렵에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프랑스 남부와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고 세웠던 왕국이다. 8세기 초반에는 지중해 일대를 석권한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건너와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코르도바 왕국을 비롯한 여러 이슬람 토후국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다. 시절에 톨레도는 코르도바 왕국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기에 무슬림들이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모토로 이교도들에게 가혹하게 개종을 강요했다는 것은 유럽인들에 의한 역사왜곡이다. 무슬림들은 다른 종교에 관대했고 이교도들과의 공존을 추구했다. 이슬람 점령 시절 톨레도는 무슬림들과 가톨릭교도, 유대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다양한 문화가 융성했었다. 지금도 톨레도 곳곳에는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들이 남아있다.


이교도들에게 가혹했던 것은 오히려 가톨릭 세력이었다. 8세기 이베리아반도를 이슬람 세력에 점령당한 이래 가톨릭교도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수복하기 위해 770 동안 벌인 전쟁을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한다. 레콩키스타는 1492년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 여왕이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토후국이었던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라나다를 함락시킨 직후에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의 항해를 지원했다. 레콩키스타의 성공으로 이베리아반도를 수복한 가톨릭 왕국은 이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무슬림들과 유대교도들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했고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종교재판을 열어 처형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했다.


이베리아반도의 한가운데에 있는 데다가 난공불락의 요새도시였던 톨레도는 레콩키스타의 성공 이후 한동안 스페인 왕국의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 주교좌성당이다. 통일 스페인 왕국의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톨레도의 오래된 건물들 일부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장(紋章) 남아 있다. 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은 필리페 2세는 1561년에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겼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발달했던 도시인지라 지역 영주들의 세력이 강해서 왕권의 강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과 비슷하다. 수도의 지위를 잃은 이후 톨레도는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저발전덕분에 중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도시가 되었다.


화가 그레코와 작가 세르반테스

가톨릭 왕국의 수도답게 톨레도에는 대성당 말고도 여러 곳의 성당들이 있다. 그중 곳이 초기 기독교의 사도인 도마의 이름을 산토토메 성당(Iglesia de Santo Tome)이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은 성당인데, 성당의 입구 안쪽에 걸려 있는 거대한 벽화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16세기 후반의 유명한 화가 그레코(El Greco) 작품이다. 14세기에 톨레도에 살았다는 오르가스 백작이라는 인물의 장례식에 천사들이 내려와서 그를 천국으로 이끄는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미술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 등과 함께 스페인의 3 화가로 꼽힌다는 그레코는 사실 스페인 태생이 아니었고 그리스의 크레타 출신이다. 본명도 도미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는 그리스식 이름인데, 스페인 사람들이그리스인이라는 뜻으로 그레코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스페인에 와서 활동하다가 톨레도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그는 타호강 건너편 언덕에서 톨레도 구시가지의 전경을 그린 <톨레도 풍경>이라는 유명한 그림도 남겼다. 톨레도를 찾은 여행자들은 누구나 똑같은 구도의 풍경 사진을 찍는데, 이런 사진을 찍는 장소가 바로 그레코가 <톨레도 풍경> 그린 곳이다.


톨레도 구시가지 안에까사-뮤제오 그레코(Casa-museo del Greco)’라는 중세풍 건물이 있다. 스페인어 ‘casa’ 집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사실 건물은 그레코가 살았던 집은 아니고 어느 부유한 유태인의 저택이었는데 그레코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었다. 미술관 이외에도 근처에 있는 산토도밍고 수도원에서도 그레코의 작품들을 있으니 미술 애호가라면 들러볼 만하다.


화가 그레코와 함께 톨레도 사람들이 자랑하는 예술가가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세르반테스는 톨레도가 아닌 마드리드 태생이지만, 그가 소설 <돈키호테> 원제가라만차의 돈키호테(Don Quijote de La Mancha)’이고, 라만차 지방의 중심지가 바로 톨레도이기 때문이다. 톨레도 구시가지에 세르반테스의 동상이 있고, 상점이나 식당들에서는 돈키호테 모양의 조형물을 흔하게 있다. 톨레도 근교의 콘수에그라(Consuegra)라는 마을에 가면 언덕 위에 여러 개의 풍차들이 있는데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하고 돌진했다는 풍차들인지도 모른다.


알카사르와 스페인 내전

알카사르(Alcazar) 스페인어로()’이라는 뜻이다. 스페인 전역에 알카사르가 많지만, 톨레도의 알카사르는 특히 유명하다. 해발 5 미터 언덕 위에 있는 톨레도 알카사르는 로마 시대인 3세기 무렵에 처음 지어졌는데 나중에 가톨릭 세력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톨레도를 수복한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사용되었다. 16세기에 카를로스 1세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을 동원해 왕궁으로 개축했지만, 완공된 10 만에 그의 아들 필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는 바람에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다. 오랫동안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는데, 1936 프랑코 장군이 공화파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군사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생했을 때에는 알카사르가 치열한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프랑코가 모로코에 주둔하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수도 마드리드를 향해 북상하고 있을 , 톨레도에 주둔하고 있던 호세 모스카르도 대령도 쿠데타에 가담했다. 공화파 정부군과 시민군들이 쿠데타군으로부터 톨레도 대부분을 탈환했지만, 쿠데타군은 이곳 알카사르를 근거지로 삼아 끝까지 저항했다. 쿠데타군은 공화파와 전투를 벌이며 동안이나 버텼고 결국 북진해온 프랑코의 군대와 합세해서 마드리드로 진격할 있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쿠데타군은 마침내 1939년에 마드리드를 함락시켰고 프랑코는 총통으로 등극했다.


역사에서 가정(假定) 덧없는 것이라지만, 톨레도의 알카사르가 너무 튼튼하게 지어진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모스카르도 대령의 군대가 일찌감치 공화파 시민군에 의해 진압되었더라면, 어쩌면 프랑코 쿠데타군의 승리와 38 동안의 기나긴 군사독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유명한게르니카의 학살 일어나지 않았을 있다. 지금은 군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알카사르 앞에서 괜한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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